
[사진= ‘Uncertain Journey’ Long Museum 2022]

[사진= ‘In Silence’ Long Museum 2022]

[사진= ‘Where are we going?’ Long museum 2022]
치하루 시오타(Chiharu Shiota)의 작품을 만나기도 전에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의 인상은 평범한 이웃처럼 푸근했고, 세련됨을 어색해하는 속 깊은 사람처럼 친숙해 보였다. 작가에 대한 신뢰와 호감이 이미 차고 넘쳤다.
그녀의 설치 작품 ‘The Soul Trembles’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롱미술관의 공간을 무한대로 확장시키고 있었다. 1층에 전시된 ‘Uncertain Journey’는 마치 왕거미가 실을 토해내며 천정과 벽을 밤새도록 기어 다닌 노동의 흔적 같았고, 선홍빛 핏줄 같은 그물망은 상해 관람객의 취향을 절묘하게 저격하고 있었다. 뼈대가 앙상한 돛단배를 향해 붉은 실들이 용솟음 치는 초현실적인 공간을 동공이 확장된 채로 서성이는 나는 치하루의 작품에 압도당하고 있었다.
2층 전시장에서는 그녀의 어린시절 기억을 형상화했다는 불에 그을린 그랜드 피아노와 낡은 의자들이 검정색 실로 거미줄처럼 엉켜 있었고, 빗줄기 속을 항해하는 듯한 흰색 돛단배의 행렬은 꿈결 같았다. 이 모든 거대한 설치 작업들이 ‘실’을 매개로 했다니, 바느질 상자 속에 얌전히 있어야 하는 ‘실’들의 반란에 적응하느라 마음이 분주했다.
나에게 ’실’이란 고요하고 소극적인 공예 도구로 한계 지어 있었다. ‘실 (thread)’이라는 재료의 유연성과 강한 물성의 잠재력을 믿고 얽어매고, 늘어뜨리고, 당기고 하면서 실을 자신의 감정, 생각, 기억들을 형상화하는 역동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는 치하루의 발상이 놀라웠다. 그녀는 물감이나 붓 대신 화폭의 한계를 벗어 던진 열린 공간에서 용기있는 실험을 하고 있었다.

[사진=‘In Memory’ Gana Art Center 2022]

[사진=‘Return to Earth’ Gana Art Center 2025]

[사진= Gana Art Center 2025]
2022년 여름, 롱미술관에 비해 공간이 아담한 평창동 ‘Gana Art Center’에서 치하루의 작품들과 재회했다. 흰색의 실로 전시실 크기에 맞춤한 단아한 설치 작품이 관객들을 조용히 맞이하고 있었다. 설치 규모가 축소된 반면 상해에서는 볼 수 없었던 평면 작품들이 풍부하게 전시되어 있어 치하루의 또 다른 작품 세계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같은 작가의 작품을 유연성 있게 공간과 타협시켜 가면서 최선의 선택을 해낸 현명한 큐레이팅이 돋보였다.
3년이 흐른 후, 허물없는 친구의 안부를 묻는 심정으로 치하루의 작품과 다시 만났다. 치하루 시오타를 한국 맞춤형으로 기획을 해준 가나 아트센터가 새삼 고마웠다. 상해에서는 볼 수 없었던 치하루의 소품들은 참 소중하다. 마주 보는 두 사람이 푸른색 실타래로 영원히 얽혀 있는 듯한 평면 작품 앞에서 하마터면 흐느낄 뻔했다. 살면서 겪어낸 수많은 인연들, 한때 빛났으나 스러진 인연,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인연, 아픈 인연, 고마운 인연, 힘이 되어준 인연…. 우주까지 함께 할 수밖에 없는 얽히고 설킨 인연(관계)의 출발점에 마주보고 서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인연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듯했다.
처음 만난 치하루의 작품이 나의 동공에 지진을 일으킨 혁명이었다면 2025년의 ‘Return to Earth(땅으로의 회귀)’ 전시는 모든 것들이 차분한 위안이었다. 암투병과 유산의 아픈 시간을 통과한 치하루는 자신이 자연의 일부임을 작품속에 절절히 담아 내고 있었고, 나도 이제는 흥분을 멈추고 그녀가 던진 실타래가 우주와 교감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게 되었다.
이 즈음, 한 해를 매듭 지을 준비가 되어 있다. 2026년을 풀어갈 새로운 실타래도 내 손안에 쥐고 있다.
밥 한그릇 안의 우주(yiemisook8@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