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맘때 J형 인간들은 난리가 난다. 파워 J인 나부터도 그렇다. 새해 새 계획을 세우는 과정은 매우 흥미롭고 하나씩 실천하는 모습을 상상하면 도파민이 출렁인다. 매년 주제를 정하고 네다섯 가지의 계획을 달력 제일 앞장에 써두는데 2025년 달력 1월에는 굵은 고딕체로 이렇게 쓰여 있다. ‘상하이에 있는 지금, 시작할 것’. 2026년 1월 1일에 곱씹어보니 놀랍게도 다섯 가지 모두 실행되었다. 작심 1년을 성실하게 이어온 것이다. 이 얼마나 거룩한 삶인가.
계획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니 신혼 때가 생각난다. 남편과 나는 매년 12월 마지막 날 서로의 신년 계획을 발표했다. (참석자는 둘이지만 우리는 꽤 진지했기에 발표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뭔가를 배워 본다거나 어떤 운동을 시작한다거나 책을 몇 권 읽겠다거나 여행지를 선정하는 계획들을 공유한 뒤 마지막으로 나는 ‘탈색’을 외쳤다.
남편의 응원으로 용기가 솟아나 새해가 되자마자 실행에 옮겼고 내 인생 최초로 금발을 휘날리며 살았다. J형 인간 둘이 뭉치니 그야말로 천하무적.
회상한 김에 세대를 거슬러 보기로 한다. 나의 계획적인 삶은 아빠에게서 비롯되었다. 아빠는 매월 마지막 주에 가족회의를 소집하고 무척 성실하게 이행했다. 검은 비닐 안에서 맥주 서너 병이 부대끼며 쨍쨍거리는 소리가 현관에 울린다. ‘아빠는 준비되었다’라는 알람 소리. 동시에 엄마는 안줏거리를 챙기러 주방으로 가고 사춘기를 앓고 있던 오빠와 나는 오만상을 쓰며 거실로 나왔다.
가족회의 주제는 매번 동결. 서로의 고칠 점을 토론하고 다음 달에는 새로 고침 하자는 것이었는데 오빠와 나는 서로 발언권을 양보하며 우애를 시험했다. 언어영역이 우수했던 내가 억지로 쥐어짜 아빠에게 원하는 것을 한 가지 이야기하면 바통을 이어받은 아빠는 잔에 채워지는 맥주보다 더 빠른 속도로 우리에 대한 바람들을 콸콸 쏟아냈다. 가족회의 때마다 반복된 레퍼토리는 아빠와 동시에 말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외워졌고 잔소리 대잔치를 버텨내며 몸을 비비 꼬다가 옆에 앉은 오빠를 봤는데 미간 주름이 선명한 채로 여드름만 쥐어뜯고 있었다.
지금의 내가 그때의 아빠 나이와 비슷해지고 나니 어슴푸레 짐작이 간다. 아빠가 붙잡고 싶었던 것은 술잔이 아니라 자식들과 마주 앉은 시간이었을까. 사춘기 아들과 딸의 꾹 다문 입을 열고 싶어 가족회의라는 명목으로 대화를 시도했지만 먹히지 않자 잔소리라도 쏟아낸 것이 아니었을까.
어쨌거나 끈질기게 지켜낸 아빠의 월말 계획, 가족회의는 무사히 나에게 전수되었다. 이렇게 매년 파워 J형 인간으로 살고 있으니 말이다. 특히 올해는 딸아이가 새해 계획을 발표하는 자리를 가졌으니 무려 3대에 걸친 가풍이 되었다.
나의 2026년 주제는 이렇다. ‘어찌 됐든 나아갈 것’. 방향은 안갯속일지 몰라도 나아간다는 건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는 것. ‘맺음’과 ‘시작’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이맘때의 긴장감이 굵은 고딕체처럼 굳건하게 지켜지길 바란다.
마침, 말의 해이기도 하니 우리 모두 말 달리자.
고운배(tj_jeong030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