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새 12월이다.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계절과 방학에 개의치 않고 서울을 오가다 보니 어느새 연말, 세월에 뒤통수 얻어 맞은 느낌이다. 2025년 1월을 펼친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 2026년 새 달력을 열어야 할 때다.
예전에는 연말이 다가오면 달력을 바꾸는 것과 함께 수첩도 새로 장만해 연락처들도 정리해 옮겨 적고 가족과 지인들의 생일도 여러 색 펜으로 표시하면서 새해맞이 준비를 했던 것 같다. 기억해야 할 날들이나 중요한 일들도 수첩 캘린더에 표시하고, 읽고 싶은 책, 가보고 싶은 맛집, 봐야 할 영화 같은 것들도 수첩 뒤 쪽에 적으면서 다음 해에 ‘해야 할 일들’을 기분 좋은 긴장감으로 맞이했었다.
그러나 몇 해 전부터 나는 더 이상 수첩을 쓰지 않는다. 휴대폰이 똑똑 해지면서 나의 모든 스케줄과 해야 할 일들을 휴대폰에 기록하고 저장한다. 가끔씩 묵은 짐들을 정리할 때마다 지난 수첩들을 어째야 하나 고민스러웠는데, 휴대폰에 기록하기 시작하니 따로 찢어 버릴 것들도 없고 쓰레기도 안 나와 편하기도 하다. 예전에 수첩을 썼던 시절엔 기억에 남는 날이나 일이 생기면 짧은 일기처럼 간단히 소회를 적기도 하고 가슴에 꽂히는 글귀는 비망록처럼 적어 두기도 했는데, 이제는 딱히 별스럽지 않은 날들이 대부분인데 뭘 기록하겠는가 하는 시큰둥한 마음에 다이어리와 거리를 둔 지 오래다.
복잡한 연말을 피해 11월에 일찌감치 서울을 다녀왔다. 연로하신 아버지도 뵙고 부모와 떨어져 홀로 생활하는 아이도 달랠 겸 길지 않은 일정으로 다녀왔다. 올해 겨울 유난히 따뜻한 상하이처럼 서울도 날씨가 시절을 착각했는지 겨울 패딩이 부담스럽게 따뜻하고 연말의 겨울 같지 않았다. ‘양지사’에서 펴내는 내년 다이어리를 사다 달라는 아버지의 청으로 서점에 가 보았더니 일찌감치 새 달력들과 여러 종류의 수첩들이 나와 신년맞이 분위기를 물씬 내고 있었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버지는 늘 ‘양지사 다이어리’를 준비하신다. 가족들의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을 적고, 금융 관련 비번이나 중요한 신상 기록들을 옮겨 적으며 새로운 일년의 기록들을 시작할 준비를 하신다. 예전에는 몇 권씩 사셔서 친구 분들에게 선물도 하셨는데, 홀로 외출하기가 불편해지고 친구 분들도 외출이 여의치 않아 지면서 이제는 한 권 사면 충분하다. 하루하루 소소한 일이라도 기록하시는 아버지 덕에 ‘그날 무슨 일이 있었던가’ 갑자기 기억을 소환해야 할 때면 아버지 다이어리 덕을 많이 봤었다.
새로 산 다이어리를 아버지께 드리면서 올해의 다이어리를 살펴보니 빈 여백의 날들이 많고 한 두줄 써있는 경우가 태반이다. 손에 힘이 없어진 탓인지 글씨도 흘려 쓰셔서 한참을 봐야 알아볼 수 있고 기억도 예전만 못하신 탓인지 날짜를 착각해서 다이어리에 기록하신 것도 있었다.
‘이런데도 다이어리를 계속 쓰신다고…’ 하는 마음이 찰나에 들었다가, 바로 내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았다. ‘이런데도 계속 다이어리를 쓰시는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고 계시네…’
손에 힘이 없어 글자가 흐르고 날짜가 헷갈려 종종 가족들에게 오늘 며칠이냐 확인하면서도, 매일을 잊지 않으시려는 아버지를 보면서, 다 쓴 다이어리를 처분할 쓰레기로 생각하고 특별하지 않은 날들을 하찮게 생각한 내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지금까지 해 왔던 대로’의 루틴을 지킨다는 것이 어쩌면 제일 어려운 일이고 어느 하루가 똑같은 날이 없었을 텐데, 나는 그동안 시간을 너무 무심히 보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나를 돌아보게 됐다. 이번 연말엔 나도 다이어리를 하나 장만해 연말의 루틴을 되찾고 하루를 아끼는 경건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수다쟁이(kijihe2025@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