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u’s Tour Essay 3th]
사람의 길, 신장 이야기 마지막
물의 길은 높은 데서 낮은 데로 간다. 모래의 길은 바람이 실어주는 대로 간다. 다만 사람의 길은 달라서, 경사를 오르고 바람을 거슬러 간다.
면화가 있는 풍경
2009년 여름에 나는 빙퇀 6사, 102퇀에 소속된 회족 농민 마씨 아저씨네에서 묵으며 면화를 따는 체험을 했었다. “고마웠습니다. 꼭 집 떠나는 기분이네요. 언제가 될지, 그런 때가 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중에 기회가 되면 돌아 올게요. 다시 오는 게 아니라, 꼭 돌아 올게요.”
그때는 다시는 이곳에 돌아올 일이 없을 줄 알았다. 쉬운 일인가 어디. 그토록 먼 땅에 다시 올 기회가 있을까. 그래서 다시 못 볼 줄 알고 입에 발린 다음에 다시 보자는 말을 하지 못 했다. 기회가 되면, 그때 돌아오겠노라고 했었다. 일주일 사이에 내게 ‘돌아오는 곳’이 되어버린 땅과 사람에게 보내는 간절한 작별 인사를 했었다. 그리고 4년이 지나서 나는 다시 이 먼 곳에 돌아왔다.
광활하게 펼쳐진 목화밭을 처음 보았었다. 너른 땅에 목화나무는 허리 높이로 가지런하고 빽빽하게 심어져 있었다. 나무들 사이의 긴 틈으로 들어가 허리를 숙이고 만개한 꽃봉오리에서 솜을 딴다. 도대체 이 끝없는 밭의 목화를 언제 다 딸까 싶다. 일꾼을 부려서 딸 때, 목화 1kg을 따면 1위안을 품삯으로 준다. 이 날 오후 동안 나는 14kg을 땄다. 저녁을 먹기에 앞서 마 아저씨는 내 품삯으로 14위안을 주셨다. 하루의 노동의 대가로 받아 든 14위안이 이렇게 무거웠던 때가 언제였던가?
대추가 익는 풍경
시골 할아버지 집 대문에 대추나무가 있었다. 산 아래 비탈에 터를 닦은 할아버지의 집은 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제법 잘 손질 된 좁은 흙길을 따라 내려가면 집의 입구가 나왔는데, 어른 팔뚝만 한 소나무 가지를 이리저리 엮어서 만든 나무 문이 있었고 문 왼편에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할아버지처럼 나이들고 메마른 나무지만 제법 많은 대추가 열렸었다. 추석 무렵에 가면 아직 설익은 푸른 대추를 따먹는 재미가 좋았다. 아삭거리면서 시원하게 씹히는 식감이 좋았다. 중국에서 과일가게의 한 자리를 차지한 대추를 보며 처음에는 적잖이 당황했다. 대추가 과일이라는 생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분류하자면 대추도 당당한 과일이다. 대추는 5,000년 전부터 식용으로 이용되었다고 한다.
오후에 들른 대추밭 주인은 나름 유명인이다. 왕장포(王长坡)의 밭에서 나는 대추는 특히 크고 맛이 좋기로 소문나서 여기저기서 취재해가기도 했다.
초원을 달리던 사람
하얀 색의 단층 주택들이 열을 맞추어 서 있다. 똑같은 모양의 집들은 하나같이 맑은 태양빛을 반사하고 있어서 눈이 부시다. 빙퇀 12사 104단 소수민족 정주定居마을은 우루무치 서쪽 20킬로미터 떨어진 산사면에 있다. 단지를 들어서는 순간부터 양고기 삶는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이곳에서 하사커 족 유목민들이 모여 산다. 말, 소, 양 등을 방목하며 초원에서 살아오던 그들이었다. 그러나 신중국 건설 이후 유목민이 증가하면서 제한된 목장 면적이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빙퇀은 유목민을 이 마을에 머물러 살게 하면서 소젖, 양젖 등의 낙농업과 농업, 관광업 등의 새로운 일을 제안했다.
이 집의 주인인 하사커 족 툴순하리(53)도 가축을 데리고 초원을 다니던 유목민이었다. 여기 오기 전 그는 104단의 제 2 목장에 있었다. 양 270마리, 말 6마리, 황소 22마리, 산양 80여 마리를 길렀다. 초원에 살던 때, 그는 사계절 동안 300제곱 킬로미터가 넘는 땅을 돌아다니며 가축을 먹여 길렀다. 계절마다 온 가축 무리와 함께 목초지를 옮겨다녀야 했는데 봄에는 지난 겨울 동안 태어난 새끼들 때문에 하루에 20km를 넘기는 것이 고작이었다. 새끼들이 제법 자란 가을 막바지에는 하루에 30km 넘게 이동하고는 했다. 말하는 중간중간 그는 창 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고는 했다. 그가 바라보는 곳에는 산도 초원도 없었다. 아마 그는 그의 눈에 담아둔 기억 속 풍경들을 되씹는 것일 테다. 이방인이 물어오는 지난 이야기가 그에게 지난 장면을 불러내는 것이다.
그는 2008년에 그 많던 가축을 모두 팔고 이곳으로 내려왔다. 병단의 안내에 따라 떠돌며 살기를 버리고 머물러 살기 시작한 1세대인 셈이다. 아들과 딸, 아내가 함께 산을 내려왔는데, 4명이었던 가족은 7명으로 늘었다. 손자들은 이제 곧 3살이 된다. 성대한 식사에 대한 보답으로 가족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했다. 전통 문양의 걸개그림 앞에 자리를 잡고, 그는 전통 모자를 썼다.
유목생활을 하던 때와 지금의 변화에 대해 물었다. 대답은 단호했다. 산에서 방목하며 사는 것이 전통이긴 했으나 사계절을 움직여 다녀야 하는 고단함은 전통이라는 이름과는 상관없이 실재하는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지금의 편리함은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세 번에 걸쳐 옮겨 적은 신장 이야기는 겨우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겪은 것이다. 넓고 깊은 땅을 짧은 관찰만으로 엮어낸다는 것이 못내 서툴고 부끄러운 작업 같아서 시원찮은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보고 들은 것을 겨우 옮겨 적는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 땅을 궁금해하고, 그곳으로 가보고 싶다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작은 단서라도 되면 좋겠다. 사막에 서 있는 호양나무 한 그루, 탈색된 그 고목을 생각한다.
▷사진·글: Mark B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