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부_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은 ‘고등학생 에세이 대회’. 나는 3등, 너는 4등으로 옆자리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너는 1학년.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살면서 우린 자주 만남을 가졌지.
너는 내게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도시에 대해 알려주었어. 그림자는 같이 들어갈 수 없어 떼어놓고 들어가야 하는 도시. 진짜 네가 사는 곳은 바로 그 도시 안이고, 지금 ‘이 세계’에 나와 함께 있는 너는 진짜가 아닌 흘러가는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그런데 여기 있는 네가 그림자이고, 그 도시에 있는 네가 진짜라고 생각해? 어쩌면 그 반대일 수도.” 진짜의 너는 그 도시의 도서관에서 일을 한다고 했어. 대략 저녁 5시쯤부터 밤 12시쯤까지. 중앙광장에 높은 시계탑이 있지만 시곗바늘은 달려 있지 않아 대략적인 시간만 알 수 있다고.
너는 내가 ‘꿈 읽는 이’가 될 수 있는 특별한 자격이 있다고 했어. ‘이 세계’에서 너와 연락이 끊긴 후 나는 너를 찾아 그 도시의 도서관으로 갔어.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 나를 만났던 건 너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았을 테니까.
2부_ ‘이 세계’의 나는 오랫동안 도쿄의 출판사에서 일을 하다가 퇴직하고 아주 작은 시골마을 Z**의 도서관 관장이 됐어. 옛 양조장을 개조해서 만든 도서관인데, 전 관장이었던 고야스 씨에게 업무 인수인계를 받아 근무하고 있어. 이 도서관은 고야스 씨의 특별한 보살핌으로 10년이 넘게 잘 운영되고 있지.
학교에 다니지 않고 매일 도서관에 나와 하루 종일 책만 읽는 소년이 있어. 항상 영화 <옐로 서브마린>에 나온 노란 잠수함 그림이 들어간 파카나 다른 캐릭터가 프린트된 갈색 요트 파카를 입고 와서 부동의 자세로 책만 읽는데, 어느 날 이 소년이 실종되었어. 마치 가미카쿠시처럼 (가미카쿠시: ‘신이 숨기다’라는 의미. 주로 어린아이들이 이유 없이 행방불명 되는 일을 일컫는다).
3부_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곳에서 이 소년을 만나. 소년은 나와 한 몸이 되길 바랐고 나는 결국 허락해 주었지. 지금까지는 기껏해야 두세 개밖에 읽지 못했던 오래된 꿈을 이제는 다섯 개까지 읽게 되었고, 점점 더 많은 꿈을 읽을 수 있었어. 소년과 내가 일체화가 됐다고 확신해.
그리고 소년은 이제 내가 떠날 때가 됐다고 알려주었어. 내 그림자도 바깥 세계에서 내 대역을 완벽하게 수행하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으니, 내가 간절히 원하기만 한다면 다시 한 몸이 될 수 있다고 알려주었어.
나는 오랫동안 이 도시에 살았고, 이쪽 생활에 매우 익숙해져서 다시 바깥 세계로 복귀해서 잘해나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어. 높은 벽에 엄중히 둘러싸인 이 도시에서 나가기란 결코 간단하지 않으니…
후기_ 이 소설은 1980년에 발표한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라는 중편소설이었다. 잡지에 싣긴 했지만 덜 익은 채로 세상에 내놓고 말았다는 느낌 때문에 책으로 내지 않았다고 한다.
이 작품에는 무언가 작가에게 매우 중요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처음부터 느꼈으나, 당시의 작가는 유감스럽게도 아직 그 무언가를 충분히 써낼 만큼의 필력을 갖추지 못해, 언젠가 적절한 시기가 오면 천천히 손보아 고쳐 써볼 생각으로 그대로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고 한다. 그 후로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소설로 재탄생했다.
나는 항상 하루키의 소설이 어렵게 느껴졌다. 속도감 있게 읽어 내려갈 수 있음은 분명한데, 난해한 부분도 많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완전히 잊고 있던 하루키의 소설에 발을 담가보았다. 여전히 난해하다. 소싯적에 나는 하루키의 머릿속은 미로로 되어있을 거라고 생각하곤 했다. 아무도 못 찾는 미로를 본인은 용케도 잘 찾아다니는 미로.
“흰 눈으로 둘러싸인 곳에 혼자 서서 머리 위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 가끔 나도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지금 과연 어느 세계에 속해 있는지. 이곳은 높은 벽돌 벽의 안쪽일까, 아니면 바깥쪽일까?” (P426)
박희정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