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건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책 결벽증이랄까. 다 읽고 난 후에도 새 책처럼 아무 자국 없는 게 좋아서 꾹 눌러 펼치지 않는다. 책의 가장 슬픈 서사는 뭔가 튀긴 자국을 가졌거나 접힘을 당한 것, 어쩌다 물에 젖어 마르면서 우는 페이지가 섞인 것이라 생각한다. 읽다가 갖고 싶은 문장이 보이면 핸드폰 메모장을 열어 직접 기록하는 수고를 서슴없이 해왔다.
그런데 무려 형광펜을 들고 좍좍 그어가며 본 책이 생겼다. 짜임새 탄탄한 소설에 열광하는 취향이라 개인의 서사가 담긴 이 책은 진도가 더디 나갔다. 그럼에도 항상 책과 형광펜을 함께 둔 이유는 나와 닮은 모습에 자꾸만 마음이 동해서.
나는 어떤 생각 하나가 탁, 걸려들면 머릿속에 종일 굴러다닌다. 단어 하나일 때도 있고 사람 한 명일 때도, 어떤 장소일 때도 있는데 작은 솜뭉치 같았던 그 생각 하나를 계속 굴리다 보면 흐릿했던 기억들이 잔뜩 묻어 또렷한 덩어리가 된다. 일종의 상상 노동을 쉬는 날 없이 하는 편인데, 이게 스트레스인지 내가 가진 특별한 재미인지 알 수 없었다. 대학 때는 친한 선배에게,
“나는 머리 감을 때 그렇게 상상력이 활개쳐. 샴푸 거품이 몽글몽글해지잖아? 그럼 별 쓸데없는 상상이 막 피어난다니까.”
영화감독 지망생이었던 선배는 화장실 가까이에 노트와 펜을 두라고 했다. 상상이 사라지지 않게 바로 메모해 두라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모인 에피소드는 ‘샴푸의 요정’이라는 단편 소설이 됐다. 지금은 행방불명 되었지만.
상상 노동을 해온 지 20년도 더 됐으니, 이젠 숨쉬기 운동처럼 사사로워서 그러려니 하고 지냈는데 지금 보고 있는 책에 똑 닮은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작가 본인이다. 그 작가는 내가 아는 사람이다. 그 아는 사람이 닮은 사람이다.
언젠가 그 아는 사람과 한자리에 있었다.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해야 하는 쑥스러운 자리였는데 내 차례가 되자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에 정신이 팔려 아무 말이나 내뱉었다. 그런 나를 보며 웃고 있는 그 사람을 봤다. 자신의 이전과 닮아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고 했다. 그 사람의 과거를 알 리 없는 나는 그저 같이 웃고 말았는데 책에서 마주했다. 의외로 어리숙한 면이 있는 당신도 상상 노동 N년 째군요?
그 사람이 쓴 새 책은 이제 형광펜으로 물들었다. 과감해지니 조금 편한 것도 있더라.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문자를 입력하는 대신 좌악 그으면 그만이니.
‘글 조각들은 메모 그 이상이었습니다. 순간의 나를 고스란히 담은 감정의 그릇이었습니다.’
내 핸드폰 메모장을 들여다봤다. 100개가 넘는 조각들이 넘실댄다. 하나씩 열어볼 때마다 당시의 감정이 짙어진다. 아이의 옹알대던 언어가 해석된 메모, 속상한 걸 쏟아내고 마음을 다잡았던 날의 메모, 그리고 미리 보인 첫 줄이 너무 아파서 차마 눌러보지 못한 메모. 흩어져 있는 감정들을 쌓아두기만 했는데 책의 끄트머리가 보일 즈음 글쓰기 앱을 다운로드했다. 아무래도 써야 할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도 널 닮은 나는 며칠을 종일 떠올렸다. 이 단어가 최선일까?
고운배(tj_jeong0308@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