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월의 풍파, 다시 등장한 ‘왕숴’
얼마 전 새 장편소설로 18년 만에 취재에 응한 왕숴(王朔)를 보는 순간, 무상한 세월의 흐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올해 67세의 왕숴는 어느덧 따뜻하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온화한 노인이 되어 있었다. 과거 검증을 거치지 않은 자극적인 기사를 함부로 써내는 기자들을 향해 그 거침없는 입담으로 삿대질하며 온 세상과 맞서 싸울 태세로 서슬 푸르던 왕숴의 모습은 오간 데 없었다. 이런 그의 모습이 생경하고 슬프게도 느껴졌다.
왕숴의 작품들은 아름다운 당대 여배우들과의 염문설로 연예잡지에 오르내리던 그의 개인사 만큼이나 당시 중국에서 큰 화제를 모았다. 그의 최근 인터뷰 동영상이 연일 화제가 되는 현실을 보며 왕숴의 과거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왕숴 나이 34 세에 출판사에서 <왕숴문집(王朔文集>을 내줬는데 이는 생존 작가 중에 선례가 없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20세기 말은 중국에서 왕숴의 시대였다고 누가 말하니, 중국 역사에 마오쩌둥 시대도 있었고 덩샤오핑 시대도 있었는데 왕숴의 시대라니 가당치 않다며 그 평가를 단호하게 거부하던 왕숴였다. 그러나 이 일화를 통해서도 중국 문화계에서 그의 위치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베이징 사투리, 욕설, 허무주의… 그 모든 것이 문학
개혁개방이 금방 시작된 중국은 외부 세계를 갑작스럽게 접하여 어리둥절한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정제되지 않은 거친 북경 사투리, 속어와 단답형의 구어체와 파격적인 내용으로 중국인들에게 신선한 충격과 통쾌함을 맛보게 했던 <동물은 사납다(动物凶猛)> 같은 그의 소설이 세상에 나올 때마다 뤄양즈구이(洛阳纸贵) 사태를 빚어냈으며 저작권 개념이 별로 없던 시기에 해적판을 마구 찍어 판매하던 이들조차 짭짤한 재미를 봤다는 얘기도 있다.
그 무렵의 작가들은 거짓을 일삼던 과거 역사에서 온전히 탈피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미화하는 경향이 있었는데 왕숴는 독자들이 당황스러울 만큼 인간의 간교함, 나약함, 뻔뻔스러움을 속속들이 드러냈다. 당시 중국 작가협회 부주석이었던 왕멍(王蒙)은 이런 왕숴를 “‘고상’의 가면을 찢어버렸다”고 극찬했다.
그의 30여 편의 작품들은 영화, 드라마로 각색이 되며, 그 중에는 국제상을 받는 유명한 영화들과 당시 시청률 96%에까지 이르는 만인공항(万人空巷)의 국민 드라마도 대거 탄생한다. 그는 당대 중국에서 문학과 시장 접목의 첫 성공자였다.
왕숴는 군인인 아버지를 둔 관계로 어릴 때부터 대원(大院, 베이징 군관 사택 단지)에서 자랐으며, 훗날 중국 문화계에서 활약하게 된 베이징 문화권(京圈) 핵심 인물들이 대부분 이 대원 출신이었다.
독설로 만든 ‘왕숴 신화’
왕숴의 영향력은 문학 범주를 벗어나 변혁기 중국의 독특한 문화적 아이콘으로 인식되고 있다. 왕숴의 강호 지위를 확정 지은 것은 늘 장안의 화제였던 작품들 외에도 중국 당대 유명 인사들에 대한 신랄한 비평 때문이었다.
2002년에 장이머우(张艺谋) 감독은 ‘영웅’이라는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이는 중국 상업영화의 서막이 되었다. 모든 투자자가 화려한 출연진과 큰 스케일로 이목을 끄는 사극 무협 영화에만 집중하며 막대한 부를 챙길 무렵에, 현실적으로 무협 시나리오는 이미 정형화의 틀에 갇히고 있었다. 왕숴는 눈앞의 이익에만 급급한 이런 상업 영화에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으며 장이머우 감독을 두고 “그는 인테리어 업계 종사자에 불과하다”고 조소를 보냈다. 또 다른 유명 영화감독마저도 “그의 취재는 이미 그의 영화를 뛰어넘었다”고 혹평했으며 수필가 위치우위(余秋雨)에 대해서도 “누구도 대가인 척하지 마라. 용납하지 않는다. 벽돌로 대령할 것이다”라고 일갈했다.
타이완 유명 작가이자 학자인 리아오(李敖)는 평생 3000 여명의 유명인에게 독설을 날린 것으로 유명하다. 왕숴를 알게 된 리아오는 “왕숴가 어찌 나랑 비길 수 있겠는가. 그가 욕한 것은 어떤 사람들인가. 내가 욕했던 사람들은 나를 감옥에 보낸 이들”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평가를 들은 왕숴 또한 불복하여 “나도 당신을 감옥에 보낸 이들을 욕할 수 있지만 당신은 나를 감옥에 보낸 이들을 욕할 수 있겠는가?”라고 ‘화답’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왕숴 vs 왕숴’ 자기비판조차 퍼포먼스로 만든 작가
왕숴는 <내가 보는 루쉰(我看鲁迅)>이라는 글을 써냈다가 루신 팬들에게 뭇매를 맞고 보이콧 당했는데 그 후에 <내가 보는 왕숴(我看王朔)>라는 신랄한 글이 등장해서 왕숴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무척 흡족해하며 열심히 퍼날랐다고 한다. 그런데 결국 이 글은 왕숴가 다른 필명으로 발표한 스스로에 대한 혹평이었다. 이렇게 왕숴는 남뿐만 아니라 자신도 스스럼없이 드러내고 날카로운 비평을 하는 것으로 자신을 질타하려던 사람들을 벙어리 냉가슴 앓듯 조용해지게 만들었다. 왕숴는 또한 당시 열악한 작가들의 권익을 위해 출판사와 싸웠는데 왕숴 때로부터 10%의 인세 대우가 생겼다고 한다.
‘건달문학’의 아이콘에서 인간 왕숴로
1993년에 화동사범대 왕샤오밍(王晓明) 교수 등은 왕숴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다. 이른바 인문 정신에 대한 대토론이었다. ‘건달문학(痞子文学)’이란 용어도 이때 나온 말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한 극작가로 성공 가도의 정점에 있던 왕숴의 사업은 이 ‘정통문학’의 포위로 큰 타격을 입게 되며, 결국 미국으로 피신을 가게 된다. 풍파가 잦아든 다음 돌아온 왕숴가 마주한 세상은 이미 달라져 있었다.
이렇게 세상과 거침없이 싸우던 왕숴도 한없이 여린 구석이 있었으니, 이혼한 전처가 키운 딸의 결혼식에 갈 엄두를 못 낸 것이다. 형편이 궁한 친구에게는 억대의 원고료도 선뜻 내어주던 그는 친구들이 많았고 또한 그의 의리파 친구들이 왕숴 대신 딸의 결혼식에 대거 참석해서 그의 빈자리를 메꿔주고자 애썼다. 중국 유명화가 천단칭(陈丹青)도 기꺼이 왕숴 딸의 결혼식에 참석해 주례를 서주었다고 한다.
왕숴는 중국 문단에 한 획을 긋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임이 틀림없다. 왕숴의 문학은 당시 ‘고급’ 서면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으며 하위문화 언어를 문학적 정전(正典)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물론 꽤 괜찮은 그의 출신을 감안해볼 때 그 또한 기득권층이었으며 그의 문학 또한 명확한 목표나 방향 없이 허무주의에 그치고 만다는 지적이 있으며 그의 시대를 뛰어넘지 못했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그럼에도 권위에 항거할 줄 아는 영웅과 전사의 모습이었던 그는 늘 사람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선사해 주었다. 그의 삶은 인간답게 치열하고 인간답게 풍성하고 입체적인 삶이었다. 이런 왕숴야말로 20세기 말, 민간으로부터 문화계에 이르기까지 위선과 가면을 떨쳐버리고 거대 서사가 아닌 오로지 인간의 가치에 대해 치열하게 반성하고 사고하게 만든, 신구 관념 교차 시기의 주류가 아니었나 싶다.
김향려(mshina052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