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준(顾准, 1915-1974)은 중국 당대 학자이며 사상가, 경제학자, 회계학자, 역사학자이다. 중국 건국 후 50년대부터 76년까지 이어진 <치욕스러운 연대(年代)>에 중국 사상계의 집단적 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사상가로 평가받는 구준은 그때 이미 처음으로 사회주의 조건에서의 시장경제 이론을 제기했다.
그는 동서양에 대한 해박한 이해와 방대한 지식 체계로 여러 방면에서 천재성을 보여준 전설적인 학자이며 특히 중국 현대 사상사에서 밤하늘을 가른 번개처럼 특별한 존재였다. 역사 속의 어두움과 복잡함을 이성과 양심으로 마주했던 구준은 외로운 선구자였으며 가장 황당했던 시간 속에서도 문제의 본질에 대해 깊이 사고했던 ‘이단아’였다.
천재 회계사에서 홍색 지식인으로
구준은 1915년에 상하이에서 태어났으며 12세에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판쉬룬(潘序伦)이 운영하는 리신회계법인(立信会计师事务所)에서 수습생으로 일했는데, 일하는 틈틈이 회계 지식과 영어를 공부하고 강의안을 인쇄하고 시험지를 채점했으며 야간학교에서 강의까지 했다. 천부적인 명석한 두뇌와 성실한 태도 덕에 곧 리신회계법인의 기둥이 되었으며 후에는 리신회계 통신학교의 책임자로 되었다. 1934년에 구준이 강의 교재로 써낸 “은행 회계”란 책은 상무출판사(商务印书馆)에서 대학 교재로 정식 출판되었는데, 이때 구준의 나이 불과 19세였다. 중졸 학력의 독학 천재 회계 전문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구준은 서재 속 공상가가 아니었으며 그의 일생은 20세기 중국의 거대한 변화와 깊이 얽혀 있다. 당시는 동서양 사상의 치열한 충돌 속에서 많은 젊은이들이 구국의 길을 탐색하던 시기였다. 구준 또한 20세기 30년대부터 항일 구국 운동에 투신하게 되며 20세에 공산당에 가입하여 지하 공작을 하게 된다. 이렇게 일찍 좌경 운동에 뛰어든 그는 훗날 재경 업무에 정통한 “홍색 전문가’로, 1949년부터 상하이 초대 재정국장을 역임했으며 신생 중국의 국민경제 회복과 재건을 위해 큰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이 독특한 경험은 그로 하여금 새로운 체제와 그 운영 논리에 대해 깊이 이해하게 했다. 이런 내부자 시각은 이후 그의 반성이 단순한 감정적 비판에서 벗어나 제도와 실천에 기반한 깊은 통찰력을 지니게 했다.
그는 당시 고위직으로 유일하게 두 번이나 ‘우파’ 모자를 쓰고 권력의 중심에서 떨어져 옥고와 갖은 시련을 겪게 된다. 아이들을 보호하고자 구준과 매정한 이혼을 택한 부인이지만 모진 박해 끝에 결국 자살을 택하게 된다. 체제의 보복이 두려웠던 다섯 자식은 말기 암 환자인 아버지의 간절한 마지막 면회 요구마저 외면해 버리는, 그 시대 가장 비참한 가정사를 지니게 된다. 이런 극한적인 어려움에서도 구준은 “그리스 도시국가 제도(希腊城邦制度)”, “이상주의로부터 경험주의로(从理想主义到经验主义)” 등 빛나는 저작을 써냈다.
혁명 이후를 묻다
구준의 반(反)이상주의 철학
구준 사상의 정수는 그가 “이상주의”의 허상을 파악한 데 있다. 동시대 사람들이 아직 유토피아에 열광해 있을 때 그는 이미 냉정하게 “노라가 떠난 후 어떻게 되었을까”(즉 혁명이 성공하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시작했으며 그의 사고는 이미 문제의 핵심에 다다랐다.
그는 고대 그리스사에 대한 심층 연구를 통해 현대 급진적 민주주의의 근원인 “직접민주제” 자체가 “다수의 폭정”을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예리하게 지적했다. “인민”을 추상적 전체로 신격화하는 것이야말로 전제주의로 가는 지름길임을 제시했다. 이러한 사고는 이후 역사적 비극의 모종의 이론적 기초를 미리 해체한 것이었다.
그는 투쟁 철학을 강조하는 변증법이 대중운동과 결합하면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를 철저히 무시하는 방향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목적이 수단을 신성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논리에 의문을 제기했으며, 이런 사고는 20세기 정치 비극의 철학적 핵심을 건드렸다.
구준은 사전 설정되고 배타적인 어떠한 “궁극적인 목적”도 단호히 반대했다. 그는 단일하게 완벽한 사회를 추구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다양성과 자유를 억압하고, 결국 사상 독점과 정치적 전제주의로 나아갈 것으로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이상주의’보다 ‘경험주의’를 주장하며 인간의 구체적인 경험에 따라 시행착오와 개량을 통한 점진적인 방식으로 길을 모색할 것을 강조했는데, 이는 교조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전복이었다.
고독 속에서 사상을 지키다
구준의 지적 용기
구준의 사상적 가치는 결론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사고 자세에도 있다. 정신과 물질의 이중적인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항상 사상의 독립성을 유지했다. 그는 많은 이들처럼 자신을 지키기 위해 침묵을 선택하거나 순종하거나 퇴폐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연구는 오로지 민족의 운명과 인류의 미래에 대한 진정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사상을 위한 사상”의 순수한 지적 추구였다. 이러한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이성을 지켜낸 용기는 “자기 갈비뼈를 떼어내 횃불로 삼겠다”는 그의 맹세를 실천했다. 훗날 중국 시장 경제학의 대부로 인정받는 구준의 제자 우징롄(吴敬琏)이 주장하는 “시장화 개혁” 주장은 구준의 사상 체계와 일맥상통했으며 구준의 경제학 이론을 전승, 발전시킨 것이었다.
구준은 단순한 좌우의 논리를 벗어나 자신이 헌신했던 혁명적 전통을 과감하게 비판했는데, 이는 서양으로의 회귀나 복고가 아니라 동서양에 같이 존재하는 전제주의의 함정을 피할 수 있는 ‘제3의 길’을 찾으려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시장 경제와 법치 사회에 대한 긍정, 그리고 과학 정신에 대한 요구는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선견지명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사상의 복잡성과 비판성은 그의 연구가 결코 어떤 단순한 이데올로기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영합하지 않은 지성
구준의 마지막 유산
구준은 1974년에 59세의 이른 나이로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주요 사상은 책, 일기와 편지, 노트를 통해 비교적 잘 보존될 수 있었다. 그는 사실 미완의 사상가로, 그의 지식적 체계가 충분히 전개되지 못했으며, 일부 구체적인 논단도 시대의 낙인을 드러내고 있긴 하다. 그러나 구준이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란 끊임없는 질문과 추궁의 정신, 이성으로 모든 신조를 검증하는 비판적 용기, 어둠속에서도 여전히 사상의 힘을 믿은 강인한 인격이었다.
오늘날 흑백의 간단한 서사가 공공 토론을 뒤덮으려 할 때마다 구준의 의미가 더욱 크게 다가오게 된다. 그는 진정한 사상가는 어떤 시대의 박수에도 영합하지 않고, 오직 내면의 이성과 양심에 충실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는 큰 정신적 등대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사상의 존엄성과 자유의 가치를 깨닫게 해주고 있다. 구준은 중국 지식인의 정신사에서 하나의 외로운 고봉이며 독립적 사고를 지닌 영혼이 도달할 수 있는 깊이와 높이가 어디까지인지 가늠하게 해주고 있다. 그의 “횃불”은 또한 중국 앞길의 험난함과 또 다른 가능성을 시사해 주고 있다.
김향려(mschina052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