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에서 아플 때는 몸이든 마음이든 그냥 아픈 게 아니라, 몇 배로 부담스러워진다. 한국에서 시도하던 적절한 해법들이 막혀, 결국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문제로 새롭게 경험된다. 언어, 환경, 비용, 기대치가 얽혀 묵직하게 몰려온다.
아프더라도 한국에 가서 아파야 하는데.
그때 다 수술해 놓고 올 걸.
여기선 그냥 참고 살아 보자.
상담을 하다 보면 몸의 불편함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동시에 그 사람이 아픔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떻게 해결하려 하는지도 보인다. 대체로 아픔은 ‘고장’으로 여겨지고, 빨리 고쳐야 한다고 믿어진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조직이나 마음을 면밀히 들여다볼 수 없다고 느끼는 마음이 또 다른 아픔을 만든다. 문제>진단>해결이라는 근대적 사고에서 비롯되는 아픔이다.
이런 사고는 의학적 상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최근 이런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흐름이 커지고 있다. 통증 분야 논문상을 수상작 <고통의 비밀>에 따르면, 아픔은 망가져서 생기는 게 아니라, 위험하다고 느낄 때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발생하는 반응이다.
이렇게 이해하면 통증 반응이 더 분명해진다. 수술 부위가 다 나았는데도 흐린 날이면 욱신거리는 경험, 치과 치료 트라우마가 스트레스로 재발하는 경험이 그 예다. 손상 때문이 아니라 ‘지켜야 한다’는 감각이 작동한 결과다. 마음의 아픔도 비슷하다. 스스로 보호해야 했던 경험이 반복되면, 과거의 상처가 자꾸 소환된다. 누군가 말 한 마디만 삐끗해도 경보가 울린다. 자신을 보호하려는 욕망이 상황을 ‘상처’로 해석해낸다. 그 결과 갈등은 커지고, 관계는 멀어진다.
이런 의미를 모른 채, 아픔을 치우려다 더 깊어지는 경우도 많다. 과도한 검사와 관리로 몸을 지치게 하거나, 진단명을 방패 삼기도 한다. 믿고 싶지 않은 믿음을 떠드는 사람을 끊어내며, 자신의 아픔도 잘라내려 한다. 감정에 대한 자기 검열도 마찬가지다.
나는 한동안 글을 못 썼다. 솟구치는 감정을 도덕적으로 승인하지 못해 억눌렀다. 타인에게 수용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덧붙였다. 그 위에 죄책감까지 얹으니 정서적 소진이 심했다. 존재를 투명화하고 표현할 자격을 스스로 박탈한 셈이다. 혹 떼려다 혹을 더 붙이는 연쇄 아픔이었다. 그래서 통증심리학 황상민 박사는 말한다. ‘아픔은 제거해야 할 것이 아니라, 내 삶이 던지는 질문이다.’ 그 질문을 외면할수록 아픔은 방어에 갇혀 왜곡된다. 신체 손상 결과와 눈앞의 사람, 불편한 상황에 몰두하지만, 어쩌면 진짜 아픔은 ‘아픔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들으려 하지 않는 내 마음일지도 모른다.
결국 아픔도, 삶도, 다 나의 이야기다. 다른 사람이 주는 해결책만으로는, 내가 왜 아픈지, 무엇을 지키려 했는지, 내가 어떤 존재가 되고 싶은 지 알 수 없다. 아픔은 내가 살아가고 싶은 방향을 알려주는 비밀의 열쇠다. 생각해보면, 타국에서 아픔에 대한 자기 책임이 커진다는 건 럭키비키일지도!
뮤약사(pharmtender@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