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잠실 파크리오, 방사형 구조와 대치동, 병원과의 접근성 덕에 지금도 높은 집값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곳은 과거 낡은 시영아파트 대단지였고, 나는 그 11평 남짓한 집에서 자랐다. 비좁지만 세 식구에게는 알맞은 둥지였다.
하지만 송파라는 지역은 내게 흔들림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교수이거나 의사인 친구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라는 물음에 “호주 갈 때 먹는 기내식”이라는 참 신비롭고 아득한 답을 듣는 일도 있었다. 나는 그 세계를 동경하면서도 우리 집과 비교하며 속으로 좌절을 쌓았다. 인정하기도 털어놓기도 어려운 감정이었다. 중학교에 들어서자 이미 영어를 자연스럽게 접한 친구들을 나는 더 의식했고, 영어를 외면했다. 사실은 내 삶의 한계에 대한 실망을 감추는 방식이었다. 상하이에 와서야 알았다. 단순히 영어가 싫은 게 아니었다. 그것은 곧 “내 삶은 여기까지야”라는 믿음이었고, 그 믿음이 수많은 가능성을 스스로 지우게 했다.
영어를 지워버린 나는 대학, 취업, 유학과 여행에서도 스스로를 배제했다. 상하이에 와서도 여전히 외국어를 기피하며 살고 있고, 아이들이 “엄마는 왜 이렇게 영어를 못해?”라며 던진 말에 끄덕인다. 그래, 나는 일부러 이런 말을 듣는 길을 선택한 거였지. 회피로 이어온 나의 삶이, 아이들의 입을 통해 너무 선명히 드러났다. 그러나 동경은 늘 남아 있었다. 외국 학위, 더 넓은 세계를 원하면서 동시에 “그것은 내 것이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는 믿음에 사로잡혔다. 그 덕분에 반짝이는 것을 계속 바라볼 수 있었으니까.
영어만이 아니었다. 공부와 성취도 같은 구조였다. 십대 시절 나는 자기 인식 대신 아이돌에 기대어 혼란을 버텼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했을 때의 마음은, “나는 공부를 안 한 바보니까, 이제라도 혼자 차곡차곡 해나가야 해.” 건실해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학대였다. 선행으로 고3 진도를 끝낸 친구들 앞에서 나는 공통수학의 집합부터 묵묵히 진행했다. 따라잡는 건 결국 이루어지는 일이었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공부하는 행위 자체가 곧 내가 바보임을 확인하는 절차였던 것. 많이 알수록 더 모른다는 역설, 메타인지가 높은 사람이 모름의 디테일에 천착한다는 설명은, 내 무능감에 그럴듯한 장식을 덧씌웠다. 나는 모르는 사람, 못하는 사람이므로, 드러내고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성취와 결과는 그저 “내가 얼마나 모르는지”를 증명하는 재검증이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믿었다. 시도하지 않아도 무능하고, 시도해도 무능하다.
이 믿음은 내게 결과에 무심한 태도를 남겼다. 결과가 어떻든 무능하니, 그저 과정을 성실히 밟아가면 된다고. 어떤 선택과 어떤 성과를 경험하든, 나는 결국 무능한 사람이라는 구조 속에 사는 것이다.
지금, 마흔. 상하이 생활 2년차. 이 심리 구조는 여전히 작동한다. 충격적인 것은, 이 믿음이 청소년기에 각인되어 이후 25년의 삶을 지배해왔다는 사실이다.
상하이에서의 2년, 그래도 나는 계속 시도를 했다. 약국이 아닌 곳에서도 상담사로 존재하기 위해, 글쓰기 모임에서 발표하고, 그림책 모임에서 내 느낌을 말하며, 따뜻한 수용 속에서 ‘표현’의 두려움이 옅어졌다. 허스토리의 글을 쓰는 일 역시, 여전히 두렵지만, 그래서 더욱 고마운 기회다.
이제 나는 상담 장면에서 더욱 선명히 안다. 아이들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은, 그 아이가 지금 어떤 믿음을 형성하며, 그 믿음이 삶을 어디로 이끌어갈지를 함께 목도하는 일이라는 것을.
뮤약사(pharmtender@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