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하이에 산 지도 어느새 9년이 되었다. 그 사이 아이들은 중고등 시기를 지났고 더 이상 나의 손길이 필요하지 않을 때가 곧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뭘 할지 생각하다가 그동안 못한 여행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작년 여름, 아이와 둘이서 대학을 알아볼 생각으로 프랑스를 다녀왔다. 호텔에 에어컨이 있어야 할까? 볼트를 부를 것인가, 지하철로 갈 것인가, 결정의 매 순간이 녹록지 않았다. 노후에 여행하고 싶다는 마음이, 내가 홀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에 점점 밀려가던 차에 <내성적인 여행자- 삶을 사랑하는 자의 은밀한 여행법>이라는 책을 보게 되었다.
자신을 지극히 내성적이라 말하는 작가 정여울은 자신이 여행했던 유럽의 여러 도시들을 1장 낯선 공기와의 첫 만남, 2장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3장 빛나는 사람, 빛나는 세상, 4장 위대한 문학의 고향, 5장 세상의 모든 예술, 6장 마음으로 가는 문 이렇게 5개의 카테고리로, 무려 36개의 도시를 소개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도시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우연히 들르게 된 작은 도시가, 우연히 들른 가게가 나만의 맛집이 되듯,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 이야기를 은밀히 귀속에 소곤대듯 풀어낸다.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맨발로 진짜 자유로운 여행을 하고, 낯선 도시 뷔르츠부르크에서 자상한 노신사의 안내로 그 도시의 매력에 빠지기도 한다. 유럽의 한 도시만 여행할 수 있다면 피렌체를 꼽으며 무궁무진한 문화유산을 가진 그곳 사람들을 질투하기도 한다.
내가 가본 파리에 대해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궁금한 마음에 먼저 찾아 읽었다. 파리에서는 구경할 것이 너무 많아 저절로 잠이 줄어든다고 한다.
나는 집에서도 혼자 책 보고 영화 보고 글 쓰며 즐겁게 잘 지낸다. 여행은 이렇게 집에 틀어박혀 있길 좋아하는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 밖으로’ 불러내는 끈질긴 주문 같은 것이다. 여행을 떠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어떻게든 바깥으로 나가게 되어있다. 평소처럼 외출이 힘들거나 귀찮지 않고 그저 하염없이 걷는다는 행위 자체가 좋아진다. 혼자 놀기의 달인인 나를 세상 사람들과 함께 놀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여행이 지닌 변치 않는 매력이다.
또 하나 이 책에서 작가는 많은 작가들의 시와 소설의 글을 인용한다. 그간 잊고 있던 문학과 음악, 미술 작품들을 찾아보며 예술적 감성이 풍만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나는 나로 존재하는 것이 피곤하여 나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인용하며,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여행을 떠나는 이유다. 나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너무도 피곤할 때 ‘나’를 벗어나 조금이라도 다른 존재로 살아보고 싶을 때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중국에서 오랜 생활을 하기도 했고 나이 탓인지 “여행은 ‘내 집이 제일이다’를 느끼려고 사서 하는 고생”이란 생각이 들기도 했다. 또 요즘은 티브이나 유튜브에서 가보기 힘든 곳까지 여행을 대신해주니 내가 이미 그곳을 간 것같이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직접 가서 보고 만지고 듣는 여행은 분명 다를 것이고 그건 나를 살아있다 느끼게 할 것이다.
작가의 소박하고 진솔한 경험이, 그 경험과 생각을 언어로 표현해 낸 글솜씨가, 내가 아는 세상은 너무 작았다는 생각과 여행을 진정으로 느끼며 하는 방법을 깨닫게 해 주었다. 이 책 표지를 볼 때마다 내가 가보게 될 도시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아 가슴이 몽글거린다.
정혜심
외국에 살다 보니 필요한 책들을 구하기가 쉽지 않아 이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자 책벼룩시장방이 위챗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그리고 2017년 9월부터 한 주도 빼놓지 않고 화요일마다 책 소개 릴레이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아이의 엄마로, 문화의 소비자로만 사는 데 머무르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여성들의 이야기를 상하이 교민 여러분들과 나누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