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하고 말끔하게 정돈된 집안을 서성이며 들이치는 햇살이 만들어 내는 명암과 그 위에 드리워진 그림자의 어른거림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일은 평화롭다. 집안 이곳저곳에 툭툭 자리하고 있는 소소한 가구들, 세상 쓸모없으나 정겨워서 살아남은 소품들, 책장에 얌전히 줄지어 서있는 서적들…… 그들은 나와 함께한 긴 시간을 머금고 있다. 세월따라 거실의 색과 분위기는 부지런히 바뀌어 왔고, 이제 머리 하얀 우리 부부만 사용하고 있는 거실은 한결 간결해지고 흰색과 크림색 만으로도 사시사철을 충분히 대변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하다.
유리장 안에 가지런히 포개어져 있는 그릇들은 굽이굽이 그들의 사연을 기억하고 있고, 나는 그곳에 어떤 음식이 담겨야 안성맞춤인지 알고 있다. 가끔 한밤중에 서성이는 다이닝룸은 이제는 성인이 된 아이들의 어여뻤던 식탐을 기억하고 있고, 이웃과 지인들이 함께했던 식사 자리에서의 덕담과 술잔이 부딪치는 소리, 술잔이 늘어가고 얼굴이 상기될수록 말 소리와 웃음이 흐드러진 꽃처럼 피어났던 추억을 고스란히 품고 있다. 내 삶의 공간은 이렇듯 세월을 기억하는 정물화처럼 내게 다가온다.



[사진= 영화 ‘화양연화’ 한 장면]
‘화양연화 The mood for love 25th anniversary edition’이 한국에서 상영 중이다. 만사 제치고 일단 영화관속의 어둠에 나를 방치시켜본다.
‘치파오’를 입은 장만옥의 자태는 비현실적으로 완벽하고, 그녀의 기다란 목과 신체의 곡선 안에서 숨죽이고 있는 아름다움은 패션의 정수를 보는 듯한 수십벌의 ‘치파오’를 통해 다양하게 빛났다. 반면 홍콩 남자배우 특유의 단단함과 섬세한 이목구비로 오묘한 내면 연기에 최적화 되어있는 듯한 양조위는 좁은 골목을 걸을 때도, 자욱한 담배연기 속에서 기사 쓰기에 열중할 때도, 비를 맞을 때도, 택시 안에서도 단벌처럼 느껴지는 지리한 양복 차림으로 장만옥의 여성성을 극대화시킨 섬세한 패션과 대조를 이룬다. 표현하지 않음으로 절절히 표현하고 있는 그들의 세련된 감정선은 내게는 담백하다 못해 들판에 널린 들꽃처럼 무심했다. 오히려 그 감정의 흐름을 상징하는 장치들이 영화를 보는 내내 나를 사로잡는다.
국수를 담는 보온통, 칙칙하고 좁은 계단, 다양한 패턴의 치파오, 라디오에서 들리는 경극의 창가, 인물들과 음식이 혼재한 시끌한 식당, 전단지가 어수선하게 붙어있는 복도의 벽, 인물들의 정적인 동작, 붉은 벨벳 커튼, 쏟아지는 빗줄기, 수시로 흐느끼는 바이올린 선율의 반복…… 왕가위 감독은 스크린 위에 ‘움직이는 정물화’를 그려내고 있었다.




[사진= Prada Rong Zhai, Mi Shang Café]
얼마전 MiShang(米仓) PRADA Rong Zhai(普拉达荣宅) 카페에 다녀왔다. 왕가위 감독이 ‘Rong Zhai’ 프로젝트를 PRADA와 협업한 연결 고리가 영화와 패션의 상업적 결합 외에 다른 미학적 지향이 있기를 내심 기대해 본다. PRADA의 열정과 여유있는 자본력이 감각있는 아시아 감독 왕가위를 만나 브랜드의 가치를 문화의 영역까지 넓히고, 대중에게 새로운 경험의 장을 열어주는 긍정적 과정 이기를 바란다.
각 방마다 영화에서 차용한 듯한 테마별 칼라가 있고, 상해와 홍콩을 절묘하게 소환시키는 고가구 안에 차곡히 정리되어 있는 접시들, 무심히 쌓여있는 책들이 누군가의 거실 같기도 해서 편안했다. 섬세하게 프레이팅된 음식과 연꽃무늬가 새겨진 커피 라떼 한모금은 아우라가 넘치는 새로운 정물화를 감상한 값을 톡톡히 치러야 했다.
밥 한그릇 안의 우주(yiemisook8@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