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꽃은 벌의 소리를 듣는가?”(Does the flower hear the bee?)라는 시적인 타이틀은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으나 전시 막바지에 이르러서야 겨우 발걸음을 하게 되었다. ‘꽃이 벌 날개짓의 진동을 듣는다’는 최근의 과학적 발견이 아니더라도 꽃이 벌의 소리를 듣고, 햇빛의 따스함을 감지할 것이라는 추측은 삶의 경험치가 제법 쌓인 나에게는 이미 확신에 가깝다.
제15회 상하이 비엔날레(2025년11월8일-2026년3월31일)는 시적인 타이틀이 예견하듯 생태철학자 데이비드 에이브럼(David Abram)이 말한 ‘인간 너머의 세계(the more-than-human world)’와 조화를 이루고 유대감을 형성해 가고자 하는 현대 미술의 다양한 시도와 실험들을 ‘Power Station of Art’의 거대한 공간에 펼쳐 놓고 있었다.

[사진= 숲의 환영 & 떠다니는 흐릿함, 제니퍼 알로라 & 기예르모 칼사디야]
현대미술의 난해한 시각 언어를 이해한다는 것은 비엔날레의 의도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쉬운 일은 아니다. 검증된 회화 작품의 전형적인 시각 언어에 길들여져 있는 관람객에게 낯선 시각 언어로 가득 찬 전시장을 감상하는 일은 모르는 동네에서 버스 노선표를 읽어 내야만 하는 도전과 흡사하다. 규모가 벅찬 전시에서는 관심 작품에만 집중하고 나머지는 공기를 마시듯 스치고 지나가는 직관적 선택을 하는 것도 현명한 관람 태도이다.
전시장 1층 로비에 들어서면 노란색 꽃밭이 하늘에서 빛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듯한 대형 설치 작품이 화사하게 관람객을 맞이하고, 바닥에 흩뿌려진 노란 꽃잎들은 한때 전기 발전소였던 전시장 건물의 회색빛 흔적을 낭만적이고 정겨운 공간으로 연출하고 있었다. 부드럽고 섬세한 분위기로 전시장을 이끌어 가겠다는 여성 큐레이터의 감수성이 여실히 엿보인다.
2층에 오르면 양혜규 작가의 브라인드 설치작이 형형 색색의 알루미늄 블라인드가 드높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흘러내리듯 균형을 유지한 채 가득 드리워져 있다. 실패로 끝날 줄 알고도 여전히 도약을 도모하고, 성공을 목표로 하지 않을 때, 진정 값지고 경험적인 시도가 된다는 작가의 삶의 태도는 그의 작품에 귀 기울이고 싶게 한다.

[사진=브라인드 설치, 양혜규]
아키 이노마타(Aki Inomata)의 ‘How to carve a sculpture-on going’ 조각품은 비버가 갉아놓은 나무토막에서 현대 조각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비버의 작품(?)을 확대 재생산하면서 ‘진정한 조각가는 비버인가? 인간 인가? 조각을 할 때 사용한 도구/기계들인가?’ 라는 흥미로운 질문을 던지며 인간 이외의 생물들과 협업을 통한 창작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발랄함이 동물 애호가인 나를 미소 짓게 한다.

[사진= How to carve a sculpture-on going, 아키 이노마타]
꽃같은 어린 생명들이 스러져 간 전쟁이 우리의 곁에서 벌어져도, 급변하는 세상속에서 나만 뒤쳐지지 않을까라는 불안을 안고 우리의 일상은 여전히 동동거리며 흘러가고 있다. 상해 비엔날레는 불확실성의 불안을 더 넓은 생명체와의 연대감으로 버티고 해소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벼는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자란다’라는 믿음으로 자연을 섬겼던 옛 어른들의 삶이 새삼스럽게 스쳐간다.
전시장을 나서는데 커다랗게 걸려있는 ‘꽃의 형태는 씨앗에게는 미지의 세계이다(The form of the flower is unknown to the seed)’라는 시구가 미지의 세상에 대한 희망과 불안을 함께 잉태한 수많은 씨앗들의 아우성처럼 들려온다. 나는 내가 무슨 꽃으로 피어날지 끝까지 모르는 채로 씨앗이 지닌 가능성에 기대어 세상을 잘 견뎌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밥 한그릇 안의 우주(yiemisook8@gmail.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