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없는 손에서, 한 세기의 울림으로





서울에 가면 안국동 옛 풍문여고 자리에 위치한 공예박물관 상설 전시장을 자주 들른다. 익명의 여인들이 한 땀 한 땀 자수를 놓으며 펼쳐냈던 인내와 그 시대가 규정한 한정된 역할 안에서도, 살아 숨쉬던 예술성을 수틀 위에 쏟아 내며 느꼈을 그녀들의 카타르시스를 만나는 일은 벅차고 아름답다. 구상과 추상을 넘나들며 비단 위에 색실로 자연과 소소한 일상을 그려내고, 가위로 자르고 다시 꿰매며 기하학적인 디자인을 ‘보자기’로 탄생시킨 그녀들은 이름을 남기지 않았다.
동시대를 살아가던 사대부들과 남성 화가들이 풍류의 언저리에서 창조해낸 사군자, 풍경산수, 풍속화 위에는 그들의 서명과 낙관이 선명한 것과는 사뭇 다르다. 여인들이 공들여 지어대던 옷가지와 자수를 놓은 생활 용품, 보자기들은 풍류와는 무관한 그녀들이 지켜 내야만 했던 지난한 ‘삶’ 그 자체였을 것이다.
우리가 칭송하는 걸출한 남성 화가들은 차고 넘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신화적인 존재, 혹은 고독한 천재로 불리며 세계 미술사에 새로운 획을 그은 인물들이 대부분 남성 화가라는 점은 너무나 당연하고 익숙해서 ‘왜’라는 질문이 오히려 생경하다. 2019년 기준, 미국 주요 미술관 26곳의 작품 중 여성 작가 비율이 11%에 불과하다는 현실은, 여성이 전문 예술가로 교육받고 활동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역사가 겨우 100년 남짓 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하고, 그녀들은 아직도 낯선 길 위에서 이정표를 찾고 있을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신지현_ Untitled

신선미_ 당신이 잠든사이(While you were sleeping)
상하이의 4월은 보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답다. 청명한 봄 햇살이 어여쁜 날, 황푸강을 바라보고 있는 롱 뮤지엄(龙美术馆, Long Museum)에 다녀왔다. 이른 시간에 방문해서 넓은 전시 공간을 온전히 내 것으로 즐길 수 있었다.
왕웨이(王薇)는 롱뮤지엄 창립자이자 관장이면서 현재 진행 중인 ‘Echoes of Her Century’ 전시를 직접 기획했다. 그녀는 남편인 류이첸(刘益谦)과 함께 중국의 유명 컬렉터로 사설미술관을 설립하고, 방대한 양의 개인 소장품을 다양한 전시를 통해 대중의 문화 자산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특히 왕웨이는 여성 작가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자신도 도전과 성장을 함께 이뤄가고 있는 중이다.
이번 ‘Echoes of Her Century’ 전시는 온전히 그녀의 소장품으로 20세기 초에서 현재에 이르는 100여년 동안 여성 화가들이 어떻게 사회적인 한계와 변화에 도전해 왔고, 그들의 예술성을 확장, 성장시켜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림에도 얼굴이 있는 것인지 20여개국, 200여점의 작품들 속에서 이름표를 확인하지 않고 작가의 국적을 추측해 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작품의 주제가 국제화되고 그 주제를 풀어내는 매체들이 다양화 됐음에도 불구하고 작가들 특유의 정체성은 여전히 작품안에서 질기게 숨쉬며 관람객에게 강한 첫인상을 선보이고 있어, 200개의 작품 중 7점의 한국 작가를 알아보는 일은 먼 발치에서도 가족을 알아보는 것과 흡사했다.
이번 전시는 2016년 왕웨이가 기획했던 특별전 ‘International Women Artists Exhibition: 그녀들’의 연장선이자 그에 대한 응답이라 한다. 10년후 2036년에 펼쳐질 미래의 전시는 오늘날 벌어지고 있는 도전과 탐구에 무엇이라 응답할 것인지 기대가 된다.
여성 작가에게 주어진 생물학적인 한계와, 사회로 부터 부과된 제약은 여전히 창작의 자양분으로 환치되어 젠더를 뛰어넘는 보편적 시각 언어로 탄생을 거듭하고 있을 것이다.
밥 한그릇 안의 우주
(yiemisook8@gmail.com)

정강자_ 한복 기념비(Monument of Hanbok)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_ 커플 The Couple

양혜규_ Spice Moon Cycle

이불_ Perdu XXXIII

최소영_ 눈온후 풍경2 After the snow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