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9년 1월 29일, 장쑤성의 창저우에서 비교적 부유한 귀족 가문 출신인 취추바이(瞿秋白 1899-1935)가 태어났다. 그러나 재산을 잘 돌볼 줄 몰랐던 취추바이의 아버지는 그의 아내와 자식들을 버리고 돌보지 않았으며, 결국엔 가난과 빛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게 된다.
이 때문에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던 취추바이는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베이징 대학에 입학하고자 했으나 수업료 문제 때문에 러시아어학관에 입학하게 되고,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에게 기본적인 시와 문장 교육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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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추바이는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초까지 중국공산당 총서기 직을 맡았다. 그는 적극적 행동주의자였고, 20세기의 중국의 저명한 문필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도 한다.
또한, 베이징 대학에서 혁명적인 사상을 나누는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에는 마오쩌둥도 참여하고 있었다. 취추바이는 그의 유창한 러시아어 실력 덕분에 베이징의 유명 신문사 <천바오>의 모스크바 특파원이 되어 소련에 가게 된다.
1922년 그는 공식적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그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 후로도 그의 정치적 진급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1923년 중국공산당 제 3기 중앙위원 겸 선전부 부부장, 1924년 중국국민당 후보 중앙집행위원, 1925년 중국공산당 제 4기 중앙위원, 그리고 1926년 중국공산당 제 5기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등을 지냈다.
1927년 8월, 취추바이가 중앙위 총서기가 되던 해, 다시 ‘좌익 기회주의자’로 몰려 총서기 직에서 파면되고 샹중파가 총서기에 올랐다.
그 당시에 취추바이는 정치의 길을 잠시 접고 중국의 지하 좌익 작가연맹의 지도자가 되어 많든 러시아 문학작품들을 번역하고 저술하는데 집중했다.
4년 후, 취추바이는 다시 공산당에 복귀를 해서 소련 정부의 교육부장 직을 맡았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결핵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고 후방에 남아 상하이로 피신하려 했지만 1935년 초 국민당 군에 발각되었고, 그 해 6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문화대혁명 당시 그는 ‘변절자’로 불렸었다. 하지만 1980년 그는 다시 중요한 혁명의 지도자로 복권 되었고 그의 고향 창저우에는 그를 기리는 기념관도 세워졌다.
그의 유명한 문학작품들 중 몇 작품들은 그의 수감생활 중 완성된 것들인데, 그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다여적화이다. 다여적화는 혁명의 대의를 위해서 개인의 사사로운 욕구를 저버려야 했던 취추바이 자신의 고뇌를 표현한 작품이다.
▷고등부 학생기자 윤지민(BISS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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