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월 12일은 중국 근현대사의 방향을 바꿔 놓은 인물, 쑨원의 서거일이다. 1925년 이날, 그는 베이징에서 생을 마감했다. 제국의 끝자락에서 공화의 시작을 외쳤던 혁명가. ‘국부’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리는 그는 지금도 중국 본토와 타이완을 넘어 동아시아 현대사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존재다. 10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3월 12일이 되면 그의 이름은 다시 호명된다.
쑨원이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청 왕조가 기울어가던 격동기였다. 그는 의사로 출발했지만, 현실의 병은 개인이 아니라 국가라고 판단했다. 해외를 오가며 혁명 단체를 조직했고, ‘민족,민권,민생’을 내세운 삼민주의를 주장했다. 1911년 신해혁명은 그 결실이었다. 이듬해 난징에서 수립된 중화민국의 임시 대총통에 추대되면서 그는 상징적인 국가 지도자가 됐다. 황제가 사라지고 공화정이 세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당시로서는 거대한 전환이었다. 다만 현실 정치는 이상만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군벌이 각지에서 세력을 다투었고, 중앙의 권력은 불안정했다. 쑨원은 다시 조직을 정비하며 세를 모았고, 그 중심에는 중국국민당이 있었다.
그의 삶은 화려한 승리담보다는 끈질긴 도전의 기록에 가까웠다. 봉기는 여러 차례 실패했고, 망명 생활도 반복됐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혁명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고, 진짜 공화는 앞으로 만들어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1925년 병세가 악화된 그는 베이징에서 치료를 받다 3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장례 소식이 전해지자 각지에서 추모 물결이 일었고, 그의 유해는 훗날 난징으로 옮겨졌다. 지금도 중산릉에는 해마다 많은 이들이 찾아와 묵념한다. 돌계단을 오르며 되새기는 이름은 단지 한 정치인의 이름이라기보다, 격동기를 상징하는 표지에 가깝다.
쑨원 사후 정국은 빠르게 재편됐다. 국민당은 장제스 체제로 정비되며 북벌을 추진했고, 이후 중국 대륙은 다시 거센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그가 꿈꿨던 안정된 공화국은 생전에 완성되지 못했지만, ‘황제를 끝낸 사람’이라는 상징성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날에도 그의 초상은 기념관과 교과서, 화폐와 기념식 속에 남아 있다. 정치적 해석은 다를지라도, 근대 중국의 문을 연 인물이라는 점에서는 큰 이견이 없다.
3월 12일은 추모일을 넘어선다. 혁명이란 무엇이었는지, 공화는 어디까지 왔는지 묻는 날이기도 하다. 쑨원이 남긴 말처럼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백 년 전 한 사람이 던졌던 질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그의 서거일이 해마다 조용히 돌아오는 이유도, 아마 그 질문이 아직 유효하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기자 이현지(상해한국학교 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