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8월 4일에 유명 사학자인 쉬줘윈(许倬云) 선생의 타계 소식이 중국 문화계에 크게 보도되면서 연일 추모와 애도의 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혼란스러운 세상을 대하며 방향을 잃은 중국 젊은이들에게 겸허하고 진솔한 인생 경험 공유와 따뜻한 충고로 이 시대 든든한 큰 어른으로 인식되던 인물에 대한 존경심과 애통함의 현장이었다.
한 치 앞을 예상할 수 없게 급변하고 불안한 시대에는 석학들의 주장과 사상에 더 관심을 기울이게 되며 당면한 현실 위기 관련 작은 불씨 같은 실마리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기대를 해보게 된다. 향년 95세로, 중국 상고사로부터 당대 현안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연구 활동을 하던 세계적인 중국 사학자 쉬줘윈에 대해 좀 알아보고자 한다.
중국 사학연구의 거목, 쉬줘윈의 삶과 사상
쉬줘윈은 1930년에 푸젠성에서 선천성 손발 기형을 지닌 미숙아로 태어났다. 평생 목발과 휠체어에 의지하며 몸의 제약을 크게 받는 삶을 살게 된다. 유족한 사대부 가문이었지만 항일 전쟁의 발발로 수술 치료도 받지 못하고 가족들과 피란길에 오르게 된다. 그 와중에 전쟁의 온갖 참상을 목격했으며 재난 많고 시름 많은 고국과 그 인간 군상에 대한 깊은 동정과 연민의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일본군 비행기가 상공을 맴돌며 무차별 사격을 가할 때 움직이기 어려운 그를 자신의 몸으로 안고 엎드리며 막아주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자신이 보호받는 순간마다 그는 인간 정신의 고귀함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1948년에 쉬줘윈은 가족들과 타이완으로 이주했으며 1949년에 타이완대학 외국어과에 입학하게 되는데 그의 역사 과목 답안지를 보고 감탄한 당시의 총장 푸스녠(傅斯年)의 설득에 의해 사학과로 전과하게 된다. 그 후로 평생 사학 연구에 몰두하게 되었다.
1957년에 후스(胡适)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을 가게 되며 시카고 대학에서 박사 공부를 하게 된다. 1960년대에 미국 민권운동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하며 미국의 사회문제에 대해서도 깊이 연구하게 된다.

[사진=청년 역사학도
쉬줘윈(许倬云)]1962년 박사 졸업 후 타이완에서 취직한 뒤에 당시 타이완 사회의 백색 테러에 항거한 일화들도 유명하다.
1970년부터 쉬줘윈은 피츠버그 대학에서 교직을 맡게 된다. 1980년에 쉬줘윈은 타이완 중앙연구원 원사로 당선된다. 2024년에 쉬줘윈은 ‘제6회 당상-한문상(唐奖-汉文奖)’을 수상하게 되는데 상금 4000만 원(미화 124만 달러)전액을 전부 한학(汉学) 연구를 격려하는데 기부했다.
‘중국 고대 사회사론(中国古代社会史论)’, ‘한대 농업(汉代农业)’, ‘서주사(西周史)’, ‘만고강하(万古江河)’, ‘설중국(说中国)’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으며 국내외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쉬줘윈은 후학들에게 늘 도움을 주기로 유명한데 피츠버그 대학 재임 기간에 중국 작가 왕샤오보(王小波)에도 많은 도움과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왕샤오보가 글에서 “나의 선생님”이라고 여러 번 지칭한 이가 바로 이 쉬줘윈 선생이라고 한다.

[사진=중국 대표 사학자 쉬줘윈(许倬云)]
“역사의 깊이는 인류 경험의 축적이지 승자의 신화가 아니다”
쉬줘윈은 사회학, 고고학, 인류학 등 여러 시각의 교차적 접근으로 역사를 연구했고, 분석의 틀을 제시했으며 직접적인 답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역사의 진실과 변천 과정을 심사숙고하게 만들었다.
쉬줘윈은 역사는 제왕 장상의 무대가 아니고 제도 교체의 논리적 추론도 아니라고 했다. 그 역사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장력 넘치게 반복되는 인류 문명의 강이었다. 그는 중국 역사는 결코 단독으로 진전된 적이 없으며 항상 “천하와 국가”, “질서와 활기”, “제도와 윤리”의 갈등 속에서 굴곡적으로 진행되어 왔다고 했다. 이런 복잡성에 대한 존중은 그의 중요한 학문적 기질이었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역사학 위에서 ‘문명’에 대한 성찰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는 중국 문화를 신격화하지 않았고 그 그림자를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국가의 자신감”이란 자신을 무소불위의 신이나 피해자로서 서술이 아닌, 자신의 암흑과 초라함도 회피하지 않고 스스로 기만하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그에게 문명은 영광에 대한 분식(粉饰)이 아니라 곤경 속에서의 선택과 발악이었으며 매번 붕괴 후의 재건이었다. “역사의 깊이는 인류 경험의 축적이지 승자의 신화가 아니다”라는 확실한 언어로 그동안 얼마나 많은 현대인들이 역사를 낭만적으로 왜곡, 해석했는지 명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쉬줘윈은 오늘날 중국의 두 개의 큰 정신적 위기로 문화의 전면적인 저속화와 전 세계적인 가치체계의 붕괴를 우려했다.
쉬줘윈에 대한 반론
이런 그의 관점에 반발하는 학자들도 꽤 있다. 그 내용도 정리해본다.
-쉬줘윈이 주장하는 문명은 어떤 문명이며 그가 애착을 지니는 명제 “문화 중국”이란 과연 정말 현대 문명으로 가는 길일까.
-쉬줘인은 많은 문명을 얘기했지만, 문명의 근본 문제에 대해서는 회피하고 있다. 그는 유려한 필치로 넓고 심원한 문명 서사를 하고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문명의 세 개의 근본 척도인 신앙, 제도와 시장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쉬줘윈은 현대 제도의 문명 핵심을 건드리지 못하고 있으며 폭정이 문명에 대한 근본적인 파괴를 직면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사실 아직 문명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는 경제문명에 대한 이해도 없다. 경제 문명이란 부유 여부가 아니라 시장제도, 사유재산 보호, 포용적인 개발을 기초로 하는 제도 문명이다. 그는 전통 농업, 시장의 윤리와 인정 경제에 주목하지만, 현대 시장 제도의 경제 문명이 없다면 그의 주장은 전원 목가일 뿐이며 현실 세계의 복잡한 도전에 대비할 수가 없다.
-쉬줘윈은 “문화 중국”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지만 그가 묘사한 문명은 과거형이며 미래지향적이 아니다. 문화적인 것이며 제도적인 것이 아니다. 온정적이나, 공의 적이지 못하다. 그가 얘기한 것은 과거 학자들과 똑같이 여전히 꿈이며 길이 아니다.
-쉬줘윈은 서양에 자리 잡고 있었지만, 진정한 문명으로 향하는 안개 속을 뚫지 못했으며 따뜻했지만, 중국에 정확한 문명 전환으로의 길을 제시하지 못했다.
양심과 진정성으로 역사를 묻다
이렇게 다양한 평가를 받는 쉬줘윈은 과거 중국의 발전도 얘기했고 오늘날 중국의 문제도 얘기했으며 서양의 제도뿐 아니라 서양의 맹점도 지적했다. 그 기조는 찬가나 비하가 아닌 일관적인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다. 쉬줘윈은 ‘반대자’가 아니었으며 항상 ‘질문자’였다. 그는 분노를 배제하고 늘 “왜”라는 학문적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쉬줘윈은 ‘성인’이 아니고 ‘위인’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세계 속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명실상부한 사학 대가로 ‘선생’이라는 두 글자에 충분히 어울리는 인물이었다.
“성공”에 대한 가치 표준이 너무 단일해진 오늘날, 쉬줘윈은 소란 속에서 평정심을 유지하고 침묵 속에서 진실함을 견지해온 거의 한 세기에 걸친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에게 지식은 권력에 아부하는 것이 아니며 역사는 정치를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게 했다. 그가 평생 학문적 수양을 이루며 실천한 입장이란 진정성과 양심이었다.
김향려(mshina052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