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을 읽을 때 작중 인물이나 작품 세계에 빠져들기까지 일정하게 견뎌야 하는 구간이 있다. 어떤 책은 족히 100쪽은 드잡이해야 무슨 맥락인지 실마리가 잡히기 시작하지만, 어떤 글은 펼치자마자 흡인력 있게 독자들을 끌고 들어가기도 한다. 가장 매력적인 첫 문장으로 내가 꼽는 작품은 카뮈의 <이방인>이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다짜고짜 훅 들어오는 문장에 다음 페이지를 넘기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첫 문장이 매력적으로 빛나기 위해서는 마지막 문장까지 도달하는 여정을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문제는, ‘나에게 남은 소원은 다만, 내가 사형 집행을 받는 날 많은 구경꾼들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나를 맞아주었으면 하는 것뿐이었다’라는 마지막 구절까지 도달하는 과정이 그리 녹록지 않다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긴 글을 점점 더 읽기 힘들어한다. 심지어 긴 영상도 길어지면 못 견디기 때문에 쇼츠나 틱톡처럼 짧은 콘텐츠가 주로 소비되는 추세다. 드라마 시리즈도 정주행할 시간도 인내심도 없어서 요약본으로 보는 사람이 많다. 이제 소설도 드라마도 조각조각 정보로 소비되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는 점점 수행하기 어려운 과제가 되고 있다.
“읽는 힘이란 ‘공중에 매달릴 수 있는 능력’(결정짓지 않고 기다릴 수 있는 능력, 영어로는 ‘pending’을 의미합니다. 이는 일의적으로 정의되어 있지 않은 개념을 포함하는 논고를 계속 읽을 수 있는 힘을 뜻하고, 다른 말로 ‘지적 폐활량’이라고 해도 좋겠습니다. 지적 폐활량이 풍부하면 ‘미결정’, 즉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면서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치다 타츠루의 <무지의 즐거움>에서 지금 같은 시대에 젊은 세대가 읽고 쓰는 기술을 개발하려면 어떤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가’에 대한 저자의 대답이다.

어릴 때부터 책을 자주 접하고 책에 대한 거부감(혹은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은 확실히 지적 폐활량이 크다. 아무리 인공지능이 수 초 만에 책 내용을 요약해 준다고 해도 몸에 체화된 명시지와 암묵지를 자유자재로 연결하여 인공지능이라는 증폭기의 도움까지 받아 도약할 수 있는 사람들이 훨씬 더 유리한 건 사실이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지적 폐활량을 훈련할 기회가 없었던 아이들은 점점 들인 공에 비해 학업 효율이 떨어지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공중에 매달릴 수 있는 능력’이란 비단 읽기에만 필요한 것일까?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기고 어떤 장애와 맞닥뜨릴지 모르지만 결정되지 않은 상태를 견디면서 앞으로 나가야 하는 일은 우리 인생 전반에 걸쳐 일어나는 일이 아닌가? 공중에 매달려서 안간힘을 쓰다가 떨어지기도 하고 말이다. 그래서 회복탄력성도 필요하고, 유연성도 필요하고, 혼자 살기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과 도움을 주고받을 줄도 알아야 하고, 내가 몸담은 환경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 바라면서 기여도 하고 협력도 도모하는 것 아니겠는가.
올봄에 온마을 프로젝트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마을이 필요하다’라는 속담처럼 엄마들이 모여 아이들이 마음껏 꿈을 키울 수 있는 안전한 장을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 처음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연하고 막막했지만, 엄마 자신의 마음부터 돌봐야겠다 싶어 그림책도 읽고 마음공부도 했다. 여름방학 때는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느끼고 관찰하는 시간도 가져보았다. 함께 그림도 그리고 시도 썼다. 그러다가 엄마들도 춤을 추고 사진을 찍으며 못다 꾼 꿈들을 펼쳐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계절을 지나고 나서 돌아보니 다채롭고 영롱한 궤적이 보인다. 내년엔 더 크고 예쁜 꿈들을 펼쳐나갈 수 있을 것 같다. 올 한 해 공중에 잘 매달려왔다.
2025년도 이제 막바지다. 일의적으로 정의되지 않고, 그래서 결코 완성될 수도 없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공중에 매달려 고군분투해온 모든 분께 정말 수고 많으셨다고 응원과 격려의 박수를 보내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