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영화 <정순>의 정지혜 감독(출처: 엠라인)]
첫 장편 연출작이 세계적인 관심을 받았다. 전주국제영화제 대상, 로마국제영화제 심사위원대상 등 8관왕을 기록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19개국 초청되며 주목을 받은 영화 <정순>의 정지혜 감독이 오는 29일 ‘제4회 상하이공감영화제’에서 상하이 한인 관객들을 만난다.
상하이한인여성네트워크 공감이 주최하고, 재외동포청이 후원하는 공감영화제의 올해 주제는 ‘디지털 성범죄’다. 그동안 디지털 성범죄 이슈는 젊은 세대의 문제로만 여겨왔는데 실제 디지털 성범죄의 가해자 중 중년 남성이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90년대생 감독이 중년 여성의 디지털 성범죄를 첫 장편으로 택한 이유도 여기서 출발한다. 정 감독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중년의 피해자가 많겠다는 생각에서 <정순> 시나리오를 쓰게 됐다는 것.
<정순> 이전 단편 <면도>, <매혈기>, <버티고>에서도 사회의 편견과 사각지대에 놓인 개인을 집중 관찰해 온 정지혜 감독에게 영화 <정순>과 우리 사회의 ‘정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상하이 한인 관객들과 영화 <정순>으로 만나게 되셨는데요, 상영을 앞둔 소감
상하이한인여성네트워크 ‘공감’의 초청으로 <정순>을 상영하게 되어 의미가 크다. 오랜 시간 여성들의 목소리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이어온 단체로 알고 있다. 물리적 거리가 있음에도 한국 여성들의 경험과 감정이 어떻게 닿는지 듣게 될 것 같아 더욱 기대된다.
중년 여성의 내면과 디지털 성범죄라는 묵직한 소재를 젊은 세대의 시선으로 풀어내신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첫 장편으로 이 주제를 선택하신 이유나, 작업의 출발점이 되었던 계기가 있을까요?
제가 이 영화를 시작하게 된 건 특정 사건보다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한 관심에서였다. 공장에서 일했던 시절 주변에서 늘 마주치던 이름 없는 여성 노동자들, 가족 안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던 여성들의 잔상들이 제 안에 계속 남아 있었다.
그들이 오늘의 디지털 환경, 새로운 형태의 폭력에 직면한다면 어떤 감정이 일어날까? 그 질문이 <정순>의 출발점이었다. 이 영화는 그 폭력 앞에서 한 인간이 어떻게 흔들리고, 다시 바로 서는 지에 대한 관찰이다.

[사진= 정지혜 감독(출처: 엠라인)]
영화 <정순>은 여러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8관왕이라는 눈부신 성과를 거뒀습니다. 한국 여성영화의 성취가 반가운 한편, 중년 여성의 디지털 성범죄라는 이야기가 세계 관객들에게 보편적인 감정으로 다가갔다는 점이 마음 한켠 씁쓸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관심과 반응을 어떻게 생각하나요?
국제적인 호응은 감독으로서 물론 기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가 다루는 폭력이 국경을 넘는 문제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넓은 지역의 관객들이 영화를 이해하고 공감했다는 건, 그만큼 비슷한 폭력이 세계 곳곳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반증한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순이라는 인물을 통해 세계 관객들과 연결되었다는 것은 의미 있게 생각하고 있다. 영화가 거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한 사람의 존재를 정확히 바라보는 태도만큼은 전달되었다고 믿고 있다.
첫 장편 영화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정순> 전과 후, 감독님의 작품 활동이나 연출 철학(창작 방향)에 변화가 있었나요?
이후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게 시선을 두는 태도를 유지하려 애쓰고 있다. 지금 촬영 중인 두 번째 장편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한다. 굳이 변화라면, <정순> 이후에는 인물이 어떻게 스스로의 삶을 확장해 나가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어떤 관계들이 형성되고 균열되는지에 더 깊은 관심을 두고 작업하고 있다.
더불어 차기작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상하이에 도착했을 즈음이면 두 번째 장편영화인 <풀문> 촬영을 마친 지 약 2주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풀문>은 열여섯 혜미가 부모를 숨기려 애쓰는 가운데, 오히려 세상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부모와 부딪히며 벌어지는 해프닝을 담은 이야기다.
다가오는 해에는 <풀문>의 후반 작업을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동시에, 세 번째 장편영화의 초고를 써보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디지털을 포함한 여러 형태의 성범죄로 인해 상처받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세상의 모든 ‘정순’에게 감독님이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당연하고 단순한 이야기이지만, 버티고 살아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굉장히 강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셨으면 한다. 그 단단함이 다른 것들에 의해 흔들리지 않도록 창작자로서 그리고 한 개인으로서 저 역시 계속 노력하겠다.
고수미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