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사람보다 더 사람처럼 대화하는 인공지능 모델이 등장해 압도적인 승률을 기록했다. 평가 방식은 앨런 튜링의 튜링 테스트로, 인격형 인공지능이 3배 더 높은 승률을 보였다. (앨런 튜닝은 사과를 베어 물고 자살한 애플 로고를 통해 친숙할 것이다.) 인격을 부여받은 대상이 더 구체적이고 뚜렷하게 인식된다는 점에서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첫 번째로, 자신의 정체성을 설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표현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더 뚜렷하고 구체적인 인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마치 일본에서 소품을 판매할 때 ’30대 어느 회사에 다니는 누구누구가 쓰던 소품’이라는 세밀한 설정을 덧붙여 마케팅하는 것처럼, 사람들은 특정한 정체성과 그에 부합하는 성격을 더 쉽게 받아들이고 상상하는 데에 마음을 쓰는 경향이 있다. 이를 통해 ‘사람답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인물 설정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애매한 대상을 ‘덜 사람답다’고 느끼고, 구체적이고 특징화된 대상을 더 ‘사람답다’라고 생각할까? 그 이유는 개성적인 존재일수록 그 이면에 결핍과 불완전함이 드러나면서 여백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여백을 통해 상대와 관계를 맺고, 효능감과 존재감을 느끼게 된다. 개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만큼 연결될 가능성도 줄어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진정성과 깊이가 사라진다.
반면, 완벽함을 고집하는 모습은 종종 ‘기계적’이거나 ‘인형 같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리는 심지어 그런 평가를 받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들이는데,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했던 그 노력이 오히려 관계성을 헤치는 아이러니로 경험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돕고 관계를 맺으면서 자기 자신을 확인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돕고 싶어하는 마음을 따라가다보면, 우월감과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가 포착되기도 한다. 누군가 도움을 줄 때, 분명 좋은 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때때로 기분이 나빠진 적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순간, 상대가 자신을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한 느낌은 우리가 요구하지 않은 정보나 지식을 받을 때도 자주 경험한다. 상대가 무언가를 모르거나 부족하다고 가정하고 대화를 하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을 제대로 인식하거나 존중할 수 있는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 사람의 행동이나 결정을 미숙함과 부족함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정서를 존중하고, 구체적인 믿음을 확인하는 것이 더 의미있게 전달될 수 있다. 때로는 특별한 도움보다는 그저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상대는 회복되고, 효율에 집중하기보다 그대로 인정해주는 것이 역설적으로 큰 자발적 변화를 이끌어내기도 한다.
사람답다는 것, 그리고 사람처럼 느껴진다는 것은 결국 정서적 공감과 경험의 해석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개념을 가장 먼저 적용해보고 싶은 곳은 아이와의 관계이다. 정보보다는 정서를, 도움보다는 곁을, 효율보다는 인정을 나누고 엄마이고 싶다. 아이가 안정감을 느끼고 도전해나가는 힘은, 자신과 세상이 연결되어 있다는 신뢰감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뮤약사(pharmtender@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