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단을 가리지 않는 정의(正义)란 없으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邪恶)만 있을 뿐이다.”
이 명쾌한 ‘정의’ 한마디에 나는 친후이(秦晖) 교수의 팬이 됐다. 가끔은 인간의 보편적 가치란 과연 존재하긴 할까? 의구심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러나 진영 간 분열과 갈등이 가장 첨예해졌다는 오늘의 한국이나 혼란스럽기 그지없는 지구촌 제반 복잡한 양상에 이 잣대를 적용한다면, 세상사를 판단하는 기준이 그렇게 어렵지 않음을 깨닫게 된다.
친후이 교수는 어떤 인물?
중국 당대(当代) 학자들 중 변혁기, 과도기의 사회와 국가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지닌 학자를 꼽으라면 단연 친후이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 친후이는 1953년생으로 중국 유명한 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이다. 1995년부터 칭화대학교에서 재직했으나, 짐작 가능한 이유로 ‘퇴직’을 당한(?) 후 홍콩중문대로 이직해 연구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친후이는 중국 ‘농민학’의 창시자 중 한 명으로, 2003년 원자바오(温家宝) 총리가 그의 저서를 감명 깊게 읽은 결과 2006년에는 친의 주장대로 ‘농민세’가 폐지됐다고 한다. 또한 일찍 남아프리카공화국 현대화 개혁에 주목한 학자였다. 친후이는 사회사와 경제사 두 학문을 기본 바탕으로 ‘좌’와 ‘우’의 이념을 뛰어넘어 동서고금을 통달한 파노라마적 사고를 지닌 학자이다.
수업에 가장 진심인 학자
친후이는 과거 20년 동안 교수 생활을 하며 오랜 기간 박사생 지도 자격도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박사나 박사후 과정의 학생들이 지도교수를 위해 많은 일을 하는 것은 중국 사회의 당연한 것으로 인식됐기에, 많은 제자들이 자신의 지도교수를 “보스(老板)”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친후이 교수는 처음부터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 할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수업이나 와서 들으면 된다”고 요구했다. 물론 이러한 성격임에도 생활에서 난제를 처리하는 능력은 한참 약했기에, 수업 시작 전마다 제대로 작동 안 되는 노트북을 수리하느라 결국 제자들을 두루 귀찮게 했다는 여담이 있다. 동유럽·구소련 전문 사학자인 부인 진옌(金雁)과 결혼사진을 찍기로 약속해놓고, 부인이 사진관에서 화장을 마치고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예 잊어버린 채 상하이 도서관에서 종일 책을 읽은 일화 또한 유명하다.
기존 연구에 대한 반론
신해혁명은 실패했는지 성공했는지 하는 문제에 관해 중국에서는 자산계급의 연약성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이 혁명이 대중 특히 농민을 동원하지 못했기에 혁명적 성과는 군벌들에게 침탈됐고 군벌 간의 혼전이 벌어졌다는 결말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친후이 교수는 경제·외교 및 정치 여러 분야로부터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 대륙 시기의 민국은 상당한 경제적 성과가 있으며, 그 예로 항일 전쟁 시기를 제외한 폭발적인 인구 성장을 꼽았다.
정치적으로도 신해혁명과 민국 시기가 실패했다고 볼 수 없다는 논리였다. 중국 역사에서 민국 초기의 군벌 할거와 혼전은 어떤 의미에서 동한 말년(东汉末年), 만당(晚唐), 북조 후기(北朝后期) 군벌 혼전의 기제와 비슷했는데, 이는 군벌의 죄라기보다는 몸집이 비대한 왕조라는 큰 배가 방향을 돌릴 때 일으키는 풍랑 같은 것으로, 사실상 인구가 반 토막 나던 주기적 재난에 비기면 민국 초기에 몸을 돌릴 때의 이 파도는 과거와는 달리 아주 약해졌다는 것이었다.
변혁기 중국에 대한 해부
친후이 사상은 복잡한 다면성을 지니고 있다. 그는 신좌파의 포퓰리즘에 대한 낭만적 상상을 비판했으며, 자유주의자의 시장 근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숭배에도 의문을 표했다. 이런 그는 늘 학문적 논란의 중심에 처했다.
그는 중국에서는 좌파가 득세하나 우파가 득세하나 이익을 얻는 것은 동일한 강세자(强势者)며, 해를 입는 것도 동일한 약세자(弱势者)라고 했다. ‘좌’일 때는 ‘공권력’으로 개인의 영역을 침범하나 공공 서비스에는 관심이 없으며, ‘우’일 때는 공공 물품을 포기하면서 개인의 권리도 보호하지 않는다. ‘좌파’는 복지국가를 만들 수 없고 ‘우파’는 공정한 시장을 만들 수 없다고 했다. “문화에는 높고 낮음이 없으나 제도에는 우열이 있다”는 그의 논단은 공공 토론에서 중요한 사상적 좌표가 됐다.
친후이의 학문적 유산
친후이의 학술적 생애는 전통과 현대의 격렬한 충돌 속에서 어떻게 사회의 공정과 개인의 자유가 수평을 이룰 것인가 하는 핵심 명제로 일관돼 있다. 그는 “저인권 우세(低人权优势)”, “공동의 하한선(共同的底线)”, “마이너스 복지국가(负福利国家)” 등 수많은 개념을 만들어 냈으며, 상아탑 속 연구에만 안주하지 않고 공공 지식인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고자 여전히 소신껏 목소리를 내고 있다.
가치 다원주의 시대에 친후이의 사고는 모범답안을 제출하진 않았지만, 그가 구축한 인지적 틀은 중국 사회의 고금지변(古今之變)에 중요한 참고 체계를 제공하고 있다. 변혁기의 안개 같은 현실 속에서 답을 찾고자 할 때, 역사적 깊이와 현실적 침투력이 있는 그의 사상이 오래오래 학술적 생명력을 지닐 것임에는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