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성처럼 등장한 예술가 ‘무신’
1984년에 대만에서 작품이 발표되면서 혜성처럼 등장한 작가가 있다. 예스러운 문체는 독자들에게 민국 시기 어느 노 작가가 다시 출토된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자아냈으며, 시공간을 가늠할 수 없게 만드는 그의 시는 그 후 대만의 자유시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이 인물은 후에 화가인 천단칭(陈丹青)에 의해 대륙에도 널리 알려진 무신이라는 작가, 시인이자 화가이다.
무신은 중문 작가들 중에 유일하게 고전 중국어의 전통과 5·4 전통을 완벽하게 연결했다는 평을 받는 문학가이다.
상하이저널에 소개한 적 있는 천단칭(중국인물열전 3)은 1982년 가을에 미국 지하철에서 우연히 만난 무신을 자신의 평생 스승으로, 가장 친한 벗으로 깍듯이 예우했으며, 훗날 노년의 무신이 고향인 우전(乌镇)에 돌아와 인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백방으로 노력했고, 현재 우전 명소로 된 무신미술관까지 개관했다. 두 인물 사이 깊은 인간적 신뢰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들이다.
무참히 짓밟힌 명문가 소년의 꿈
무신은 1927년 저장성 우전의 손씨 성을 가진 큰 가문에서 태어났는데, 본명은 손박(孙璞)이라고 한다.
무신의 어머니는 당시 유명한 학자를 모두 찾아 어린 아들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이 있었는가 하면, 사서오경과 중국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도 있었다. 소년 시기에 무신은 이미 바그너, 니체와 서양 철학에 대해 공부할 수 있었으며, 13~14세부터 작품을 발표했다고 한다. 무신의 시를 본 스승이 깜짝 놀라며 “이 시들을 당시(唐诗), 송사(宋词) 속에 넣어도 누구도 못 알아챌 것이다”라고 칭찬을 했는데, 무신은 이 평가를 듣자마자 자신이 쓴 시들을 화로에 태워버렸다고 한다. 의아해하는 어머니에게 무신은 “저는 새로운 경지의 시를 쓰고 싶었는데, 당송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면 제가 여전히 모방의 능력에 머무르는 것이니 태워버려도 무방합니다”라고 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원래 무신이 상업이나 정치에 입문하기 바랐지만, 무신은 그런 곳에 관심이 없었으며 화가를 원했다. 1946년에 무신은 상하이 미술전문학교에 입학했으며, 거장 류하이쑤(刘海粟)에게 서양화를 배웠고, 후에 항저우 국립예술학교로 옮겨 린펑몐(林风眠)에게 동서양 미술을 사사했다. 1947년에 무신은 반기아, 반내전 학생운동에 참여했는데, 낮에는 거리에서 전단을 뿌리고 반전 만화를 제작하고, 밤에는 쇼팽과 모차르트를 들었다.
이런 활동으로 인해 학교로부터 제적당하고 한동안 망명했다가, 1949년에 다시 대륙으로 돌아온 무신의 이 선택은 결국 그가 시대의 무자비하고 거침없는 풍랑 속에서 질풍노도의 삶을 겪는 이유가 된다.
무신의 가문은 세 번이나 집을 압수수색당하게 되는데, 그 명문가의 엄청난 골동품들이 그때 다 사라지고 말뿐만 아니라, 무신의 그간 모든 작품들도 야만적인 인간들에 의해 다 잿더미로 변하고 만다.
황당한 시대와 운명을 같이 한 무신
무신도 1956년부터 박해를 받아 세 번이나 감옥에 들어가게 되며, 장장 22년에 걸쳐 자유를 심하게 제한 받는 지난한 삶을 경험하게 된다.
아무리 남의 눈에 띄지 않으려 해도, 그 시기에 맞지 않게 깔끔하게 차려 입은 무신은 늘 표적이 되었다. 비상식적인 사회는 아름다움에 대한 악마의 본능적인 파괴력을 극대화하는 법이다. 어떤 회의에서 하이네를 무시하는 어떤 윗사람에게 “당신 같은 인간이 하이네를 무시할 자격이 있는가?”라고 격분해서 대들었던 무신. 무지한 인간들에 향한 저항을 이렇게 표출하고야만 그가 옥중(囹圄)의 몸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많은 이들이 그 수모와 혹독한 고문을 못 견뎌 미치거나 사망하거나 했다. 무신은 감옥 안에서 낮에는 화장실을 청소하는 등 온갖 더러운 일을 했지만, 저녁에는 종이에 그린 피아노 건반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베토벤 음악을 연주했다. 그는 이 시기의 자신을 “낮에는 노예였지만, 밤에는 왕자였다”고 얘기했다.
남들이 잠든 시간에 그는 또 몰래 숨겨둔 돈으로 가장 싼 물감을 사서 33폭의 산수화를 그렸다. 훗날 이 작품들은 예일대에 소장되며, 뉴욕과 런던 대영박물관에서 순회 전시되기도 하는데, “오성급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또한 감옥에서 그는 반성문을 쓰는 종이를 감춰두고, 66장의 종이에 깨알보다 작은 글씨로 65만 자의 작품을 써서 겨울 솜옷을 뜯어 그 속에 접어넣고 다시 꿰매어 가지고 나왔다.
갖은 박해와 잔혹한 구타로 손가락이 세 개나 부러졌지만, 그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과거 옥중 생활을 구구절절 얘기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무신 작품을 통틀어봐도 이런 고난의 역사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 고난을 만들어낸 당사자들에 대한 온전한 경멸이야말로 그들에 대한 복수이며, 어디에 하소연하는 것조차도 그런 인간들에 대한 대우로 생각해서 자신을 도고하게 지키고, 품위 있는 모습으로 그들을 거론도 안 할 정도로 멸시하는 것이 예술가의 마땅한 태도로 생각했던 듯싶다. 이는 문화대혁명 후에 대륙에서 유행했던 상흔문학, 심근문학 등 사실주의 문학과 결을 달리하는 무신 자신만의 창작 세계였으며, 그만의 문학 왕국이었다.
“그들은 나의 훼멸을 원하지만,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는 예술이 나에게 가르쳐준 교양을 저버릴 수 없었다”고 했다.
무신의 예술 세계
이렇게 소신대로 자신만의 문학을 지향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경력과 성격, 그리고 방대한 지식 체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의 창작은 고금중외를 자유롭게 드나들었으며, 그의 작품은 독특한 감수성과 예지(睿智), 인간사를 굽어보는 아량과 기품까지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선종, 석가, 도가, 기독교까지 융합, 병립하여 인간의 삶과 지혜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에서 5년에 걸쳐 당시 도미했던 중국 지식인들에게 주말마다 세계문학사를 열강했던 무신의 강의 내용은, 후에 그 강의를 들은 천단칭의 필기 노트로 인해 <문학 회고록(文学回忆录)>이라는 이름으로 정리되어 세상에 나오게 된다.
천단칭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 무신을 안 만났더라면, 이 시대의 문제를 흔한 일상으로 치부했을 것이다. 이런 인물이 나왔기에 그와 비교해 보며 우리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자존감이 없었고, 결벽이 없었으며, 아름다움을 몰랐고, 존경을 몰랐다.”
무신은 “미학은 나의 망명이다”라고 했다.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정신적인 귀족이었으며, 그가 모든 열정을 다해 사랑했던 미학은 그의 삶 가운데 가장 어려운 시간들을 함께 했고, 그를 구원했으며, 그를 성취시켰다. 무신의 작품은 생명의 철학에 대한 끝없는 탐구와 추구로 일관되어 있었다.
무신의 시 한 구절을 적어 본다.
“나는 암흑 속에 흰 눈 휘날리는 사람이거늘. 그대가 더 오지 않으면 눈을 내리고 말리라.”
김향려(mshina0520@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