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고 일어나니 책이 모두 사라졌다. 상하이 입국을 앞두고 한국에 있는 모든 짐을 정리했는데, 그 중에는 묵은 책들이 있었다. 미련 묻은 전공 서적들과 내가 살아온 경험이 더 눈부셔서 더 이상 펼쳐볼 일이 없어진 유치한 자기계발서. 그리고 유행 지난 잡지들이 추려졌다. 노끈으로 야무지게 묶은 네 덩어리. 그리고 나와 함께 상하이 라이프를...
독자이야기
10월 연휴가 끝나갈 무렵 충칭을 다녀왔다. 어디든 모여 있을 수많은 인파를 감당할 수 없을 듯하여 연휴의 한창때를 피해갔건만, 역시 ‘핫’하다는 곳에는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사람들이 모여 들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다. 지금이 10월이 아니었던가 싶게 기온이 30도를 넘고 길거리 어디든 벗어날 수 없는 매운 양념 냄새가 체온을 더...
2025년 현재 시점, 나는 상하이 생활 23년 차에 접어든 ‘신상하이인’이다. 올해 딸애는 25fall로 드림스쿨 꿈을 이루어 미국으로 유학을 갔고, 그 동안 손녀 딸 애지중지 키워주셨던 부모님도 고향에 들어가시는 바람에 상하이엔 나랑 남편 둘만 달랑 남았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주방과 거실에서 분주하게 돌아치던 부모님의 그림자도, ‘엄마’를 부르는 딸애의 응석어린...
중국 돈 6만 위안을 빌려줬다. 4년 전에. 그녀를 알고 지낸 지 3년쯤 됐을 때였다. 자신의 가게를 운영하는 친구였고 너무 열심히 즐겁게 일하는 친구여서 항상 응원하고 금전적으로도 필요하면 여러가지 방법으로 도움을 주곤 했다. 한번은 한국 돈 500만원 정도를 한 달 정도 빌려달라고 했으나 왠지 진짜 돈으로 얽히면 순수한 우정이 망가질까...
추석 밤하늘에 휘영청 달이 떴다. 올해는 유난히 유리알처럼 반짝인다. 둥근달 안에 그리운 얼굴이 하나씩 스쳐간다. 세상을 떠난 이들도, 남아있는 이들도 모두 그리움의 대상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빠, 엄마 그리고 세상에 하나뿐인 남동생. 안부를 건네는 것도 낯간지러워 무소식이 희소식이라 여기며 살아가는 녀석이 어느 날 전화를 했다. 퇴근길에 들린 음식점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잠실 파크리오, 방사형 구조와 대치동, 병원과의 접근성 덕에 지금도 높은 집값을 자랑한다. 그러나 그곳은 과거 낡은 시영아파트 대단지였고, 나는 그 11평 남짓한 집에서 자랐다. 비좁지만 세 식구에게는 알맞은 둥지였다. 하지만 송파라는 지역은 내게 흔들림의 연속이었다. 부모가 교수이거나 의사인 친구들,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 뭐야?” 라는 물음에 “호주 갈 때 먹는...
아이들이 모두 떠났다. 셋째까지 올해 대학에 입학하면서 이제 집엔 나 홀로 남았다. 여기서 집이란 상하이 집을 말하는 거다. 둘째가 태어난 2004년에 이사 와서 21년을 꼬박 살았다. 둘째와 셋째는 이 집에서 태어나 고 3때까지 살았으니 평생을 여기서 산 셈이다. 상하이 집은 그들에게 탄생지인 동시에 고향인 셈이다. 집을 팔까 생각했지만 여러가지...
얼마 전 TV에서 방송인이 된 추성훈과 그의 일행이 중국 충칭에서 국수를 주문하는 장면을 보게 됐다. 중국어가 통하지 않자 손짓발짓, 바디랭귀지를 총동원해 간신히 주문을 마쳤다. 충칭은 지역 방언이 심해 번역 앱도 무용지물인 것 같았다. 처음 중국에 왔을 때의 내 모습도 딱 저랬을 것이다. 지금은 제법 자연스럽게 음식 주문 정도는 할...
젊은 날 나는 품위 있는 손님이 되는 법도, 손님을 환대하는 법도 알지 못했다. 군 복무 중이던 연인을 면회하던 날, 나는 그가 소중히 간직해 두었던 내 편지들을 차곡차곡 회수해 가방에 넣었다. 잘 챙겨 두겠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모두 없앨 요량이었다. 종이에 적힌 마음이 어느 순간 내게 짐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돌아오는 차...
7월의 햇살은 부지런도 하다. 아침 7시만 넘어가도 쨍쨍하니 말이다. 내리쬐는 태양을 피해 새벽 6시쯤 남편과 집 앞 공원으로 산책을 나섰다. 그린벨트 숲을 재조성해 놓은 곳이라 운동이나 산책을 즐기기에 더없이 좋다. 남편은 기다란 가로수길을 걸으며 시 낭송하기를 좋아하고, 나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구경하기를 좋아해서, 공원에 도착하면 서로 헤어졌다 돌아갈 때 다시...
